1697년(肅宗 23) 12월 18일, 官婢 又伏이 兼司僕 權通○에게 安東府 東先面 馬坪員에 있는 토지 2필지를 논밭을 팔면서 작성해준 토지매매명문
내용 및 특징
1697년(肅宗 23) 12월 18일, 官婢 又伏이 兼司僕 權通○에게 安東府 東先面 馬坪員에 있는 토지 2필지를 논밭을 팔면서 작성해준 토지매매명문이다. 문서의 일부분이 결락되어 있다.
안동에 세거하는 고성이씨 집안에는 조선시대 토지매매명문이 270건 가량 전해지는데, 문서의 작성 시기는 16세기부터 구한말까지를 포괄한다. 이 일련의 토지매매명문은 고성이씨가 토지를 매입하는 과정에서 작성된 것이거나, 매입한 토지의 본문기로서 함께 넘겨받은 것이다.
문서의 발급 시기는 ‘강희36년 정축, 12월 18일’이다. 토지매매명문은 중국 연호를 이용하여 연도를 표기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문서의 수취자 즉 토지를 사는 주체는 ‘兼司僕 權通〇’이다. 이름 마지막 글자는 결락되어 알 수 없다. 문서의 발급자 즉 토지를 파는 주체는 ‘官婢 又伏’이다. 조선시대 양반은 토지거래를 할 때 본인 스스로 나서지 않고 소유한 奴의 명으로 거래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역시 우복이 상전의 토지거래를 대행한 것일 가능성이 있다.
토지를 파는 사유는 ‘요긴히 쓸데가 있어서’이다. 조선시대에는 토지를 거래할 때 명문에 토지를 매각하는 이유를 명시하게 되어 있었다. 초기에는 사유를 구체적으로 명시하였다. 반면, 토지매매가 일상화된 조선후기에는 사유를 구체적으로 적지 않고 ‘切有用處’라거나 ‘要用所致’와 같이 간단히 표현한 경우가 많다. 매각하는 토지의 소유 경위는 ‘스스로 매득한 것’이다.
거래 대상 토지는 安東府 東先面 馬坪員에 위치한 것으로, 2필지를 함께 거래 하였다. 하나는 字號 미상에 지번이 9○이고, 면적은 ○負 5束이다. 다른 하나는 같은 자호에 지번이 93인 밭의 일부 3負 5束이다.
지명에 나타나는 ‘員’은 ‘도리’라고 부르기도 하였는데, 들판 이름에 붙는 접미어이다. ‘字號’ 및 ‘地番’, ‘負’ 및 ‘束’은 조선시대 양안제도에 따라 토지위치와 면적을 표기할 때 사용하는 용어이다.
매매 가격은 동전 35냥이다. 조선시대 동전이 지방군현까지 거래 수단으로 자리 잡은 시점은 17세기말~18세기 전반이며, 지역에 따라 차이가 난다. 안동에 세거하고 있던 고성이씨 가문에서 보관하고 있는 토지매매명문에 나타나 있는 거래 수단을 확인해 보면, 포목이 사용된 가장 늦은 시점은 1707년(숙종 33)이고 동전이 사용된 가장 이른 시점은 1693년(肅宗 19)이다. 따라서 안동지방에 동전의 유통은 대략 1693년~1707년 즈음으로 볼 수 있다.
본문기를 함께 넘긴다고 하고 있다. 몇 장인지는 알 수 없다. 매매대상인 토지의 이전 매매명문인 本文記(=舊文記)는 토지를 파는 자의 소유권을 증명하는 수단이었다. 이는 매입자에게 모두 넘겨주어야 했고, 넘겨주지 못할 때는 그 이유를 명문에 표기하는 것이 관례였다.
문서의 말미에는 해당거래와 관련된 사람들이 차후에 본 거래에 대하여 이의나 분쟁을 제기할 경우를 대비하는 ‘追奪擔保文言’을 적는다. 이 문서는 ‘이후에 아무 족속 중 사람이 잡담하거든 이 문서를 가지고 관에 고하여 변정할 것’이라고 표기하였다.
일반적인 매매명문에서는 가까운 사람이 증인과 筆執으로 참여하게 되어 있다. 이 문서에는 증인은 私奴 多勿沙○이, 필집은 醫生 權泰謙이 참여하였다. 발급자와 증인은 手寸을 하였고, 필집은 수결을 하였다. 수촌은 가운데 손가락 모양을 그리고 마디를 표시하는 방식으로, 손바닥 전체를 그리는 手掌과 같이 글자를 쓸 줄 모르는 자가 본인임을 증명하는 수단이었다.
김성갑, 韓國學中央硏究院 博士學位論文,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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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경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