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3년 안동군 길안면(吉安面) 대곡동(大谷洞) 토지조사부(土地調査簿)
대곡동(大谷洞)은 한말까지 임하현에 속하였다가 1895년(고종 32) 지방관제 개혁에 따라 임남면에 편입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정에 따라 부곡리 · 검단리와 청송군 부서면의 병보리를 병합하여 길안면 대곡리가 되었다.
대곡리는 길안의 동북쪽에 위치한다. 대곡리의 주변은 높고 험준한 산들이 있으며, 여러 자연마을들은 이 산들에 둘러져 있는 분지형태를 이룬다. 마을의 일부분은 임하댐 건설로 수몰되었으며, 현재는 한실 · 보초(甫草) · 하직골 · 개맬 · 추곡(楸谷) · 모현(茅峴) · 검단(儉丹) 등 모두 7개의 자연마을이 있다.
한실은 대곡(大谷)으로도 불리며, 대곡리에서 가장 큰 자연마을이다. 대곡리의 명칭도 이 마을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마을의 골이 깊고 크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라고 하며, 차가운 물이 흐른다고 하여 붙여졌다고도 한다. 보초는 보풀떼라고도 하는데, 마을에 풀이 많이 자란다는 뜻에서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하직골은 해질골 · 화지곡(花枝谷)이라고도 하며, 원래 상하직골 · 중하직골 · 하하직골 등 3개의 마을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임하댐 건설 당시 중하직골 · 하하직골은 수몰되었으며, 현재는 상하직골만 남아 있다.
개맬은 가마골 · 부곡(釜谷)으로 불린다. 마을의 지형이 가마솥 모양이어서 처음에는 가마골이라 하였다가 차츰 이 말이 변하여 개맬이라고 부르나, 한자로 표기할 때는 부곡이라고 쓴다. 추곡(楸谷)은 가라골이라고도 하는데, 가래나무가 많이 자생하고 있어 그렇게 불렸다. 이곳이 행정구역상 청송군 파천면 병부리와 안동군 길안면 대곡리의 경계면에서 안동과 청송을 갈라지게 하는 골짜기이어서 가라골이라고 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모현(茅峴)은 모티 · 모치라고도 하는데, 약 300년 전 검단의 안동김씨가 이곳으로 이주하여 마을과 농경지를 개척하였다. 당시 큰 못의 뒤쪽에 있는 마을이어서 못뒤로 부르다가 모티가 되었다고 한다.
검단은 검당이라고도 하는데, 임진왜란 때 안동김씨가 이 마을로 피난을 와서 마을을 일구었다. 마을의 명칭은 피난을 오기 전의 마을 이름 그대로 검당이라 하였다고 한다.
1913년 대곡동에는 姜氏, 權氏, 金氏, 牟氏, 朴氏, 孫氏, 宋氏, 禹氏, 劉氏, 柳氏, 尹氏, 李氏, 張氏, 鄭氏, 洪氏, 黃氏 등 적어도 16개 이상의 성씨가 거주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가운데 金氏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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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