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3년 朝鮮總督府 臨時土地照査局에서 慶北 安東郡 吉安面 金谷洞의 田畓과 垈地, 林野, 墳墓地 등의 소유자로부터 신고서를 제출받아 작성한 토지 장부
安東郡吉安面金谷洞土地調査簿
자료의 내용
1913년 朝鮮總督府 臨時土地照査局에서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여 전국의 토지를 파악하고자 하였다. 이 때 개인의 전답소유권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토지신고서를 작성하여 제출해야 했으며, 만약 토지신고서를 제출하지 않는 지주가 있으면 그의 소유지는 國有地로 편입되었다. 이 같은 조치에 따라 경북 안동군 길안면 금곡동의 田畓과 垈地, 池沼, 林野, 墳墓地 등을 소유한 소유자들은 1913년 3월 8일부터 1914년 4월 10일까지 토지신고서를 작성하여 제출하였다. 일제는 이를 근거로 『安東郡吉安面金谷洞 土地調査簿』를 만들었다.
토지신고서의 제출은 여성도 가능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는 남자들의 이름으로 신고하였다. 그 결과 어린이들이 신고주체가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여자 이름이 공문서에 기재되는 것을 기피하였던 전통 때문에 빚어진 것이다.
금곡동의 토지는 모두 585필지 382,689평이다. 이 가운데 田은 386필지 294,219평, 畓은 127필지 60,889평, 垈는 58필지 16,184평, 林野는 6필지 7,089평, 社寺地는 4필지 2,736평, 墳墓地는 4필지 1,572평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체적으로는 전이 답보다 필지 수에 있어서 3배, 면적에 있어서 4.9배나 많다.
『土地調査簿』의 所有者 住所欄은 아주 혼란스럽다. 그것은 토지 申告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직전에 이루어 졌기 때문에 소유자 주소는 행정구역 통폐합 이전의 〮군 ․ 면 ․ 동체제에 따라 기재되어 있다. 즉, 옛 禮安郡이나 안동군의 北先面, 東先面, 臨南面, 西先面 등은 1914년 통폐합되어 그 명칭이 소멸되어 버렸지만, 주소란에는 여전히 소멸된 군 ․ 면 ․ 동의 이름으로 기재되어 있다. 자료 정리에 있어서 이런 경우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소유자 주소란에 주소가 기재되어 있지 않는 경우이다. 이것은 소유자 주소와 토지 소재지가 일치하기 때문이다. 즉, 주소란이 공란으로 처리된 경우는 토지 소유자 또는 신고자가 本洞民임을 의미한다. 주소가 기록되지 않은 경우에는 군 또는 면단위에서의 자료 통합을 위해서 토지소재지 동리 명을 그대로 주소로 표기하였다. 그러나 토지소재지의 군 ․ 면 ․ 동 명칭은 1914년 개편이후의 행정체제에 따랐기 때문에 타동민의 주소 표기와는 체제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사정으로 인하여 『토지조사부』 소유자 주소는 결과적으로 행정구역 개편 전후의 군 ․ 면 ․ 동체제가 혼재되어 있는 셈이다.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각 군 ․ 면별 자료를 통합하고 소유자별로 정렬하여 주소를 재정리하는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다. 자료 이용에 있어서 이 점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소유자별로 國有地는 임야가 5필지 6,578평 이고, 나머지는 모두 民有地이다. 금곡동은 미천리와 묵계리의 일부를 병합한 것이다. 이 때문에 미천리와 묵계리의 주소로 금곡동의 토지 소유를 파악할 수밖에 없다. 금곡동의 민유지 소유자는 총 154명이다. 이들 154명 가운데, 금곡동을 주소로 한 토지 소유자는 61명, 다른 지역에 살고 있는 소유자는 93명이다. 금곡동 소유자의 성씨별 분포는 모두 14개 성씨로 李氏 22명, 鄭氏 11명, 崔氏 8명, 金氏 5명, 林氏 4명, 田氏 ․ 趙氏 각 2명, 權氏 ․ 南氏 ․ 朴氏 ․ 吳氏 ․ 禹氏 ․ 池氏 ․ 洪氏 각 1명이다. 금곡동 소유자의 토지는 전 199필지 130,722평, 답 56필지 21,233평, 대지 28필지 10,292평, 임야 1필지 511평이다.
기타 및 특이사항
기타사항은 宗中財産으로 鄭圭錫이 전 1필지 3,027평, 답 1필지 384평, 대지 1필지 142평을 가지고 있다.
龍潭寺는 전 27필지 22,707평, 답 14필지 10,425평, 임야 5필지 661평, 사사지 4필지 2,736평을 가지고 있다. 현재 용담사의 주소는 길안면 금곡리로 되어있다. 『토지조사부』에는 眉川洞으로 기록되어 있다. 용담사는 미천에서 약 1.3km 떨어진 지역이고, 신고 당시 1913년으로 아직 행정구역이 개편되기 전이다. 그래서 미천동으로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자료적 가치
일제강점기인 1910년대의 안동군 길안면 금곡동의 국유지와 민유지의 토지분포 상황, 개인 또는 門中, 書院, 鄕校, 私立學校 등의 토지소유현황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다. 그러나 『토지조사부』의 소유자가 곧 실재의 토지소유자가 아닌 경우도 있다. 같은 호에 거주하던 父子, 兄弟가 각각 토지신고서를 제출하기도 했고, 반대로 부자, 형제간의 개별 소유지를 한 사람의 이름으로 신고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分錄과 合錄은 조선시대부터 내려오던 오랜 관행이었다. 또한 宗中財産을 종손 개인의 이름으로 신고한 경우도 많았다. 따라서 『토지조사부』를 통해 당시의 소유 실태를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하여 『토지조사부』의 자료적 가치가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이를 통해 1910년대의 전답분포나 토지소유현황 등 전반적인 추세를 살펴보는 데는 어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土地調査事業은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 식민지 지배를 위한 기초적 사업 가운데 하나였고, 『토지조사부』는 바로 그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식민지지배 정책과 과정, 土地 ․ 林野의 침탈의 과정, 규모 등을 살필 수 있다. 실제로 『토지조사부』에는 朝鮮總督府의 토지침탈 국책기관이었던 東洋拓植株式會社 또는 일본인들의 토지소유 상황도 확인할 수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토지조사부』가 동리단위로 작성되었고, 또 소유자의 거주지가 1914년 府 ․ 郡 ․ 面 ․ 洞里 통폐합 이전의 행정구역명으로 기재되어 있어서 개편 이전의 면리동의 행정편제, 동리의 규모, 호수, 거주 성씨, 개인별 토지소유 현황 등도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다.
『朝鮮土地調査事業硏究』, 愼鏞廈, 韓國硏究院,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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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の姓』, 朝鮮總督府, 龍溪書舍, 2002
『安東의 地名由來』, 안동시립민속박물관, 安東民俗博物館, 2002
『안동 독립운동가 700인』, 김희곤, 안동시, 2001
김명자,김효심, 김순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