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3년 안동군 길안면(吉安面) 대사동(大寺洞) 토지조사부(土地調査簿)
대사동(大寺洞)은 길안면의 남쪽에 있는 마을이며, 지금은 대사리로 불린다. 마을에 큰 사찰이 있었다고 하여 한절 · 한절골 · 대사촌(大寺村)으로 불리다가 대사동이 되었다. 대사동은 원래 임하현에 속한 지역이었으나 1895년(고종 32) 지방관제 개정에 의하여 안동군 길안면에 편입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대사리가 되었으며, 이때의 구역이 변함없이 오늘에 이른다.
길안면사무소 사거리에서 영천방면의 국도를 따라 12km 정도 가면 왼쪽에 대사리로 들어가는 작은 도로가 나타난다. 이 도로로 접어들어서 2km 정도 가면 대사리가 나타난다. 대사리의 서북쪽에는 길안천이 돌아 흐르고 있으며, 남쪽에는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는 학소대(鶴巢臺)라는 바위가 있다. 앞쪽에는 한밤들로 불리는 넓은 들이 있다.
대사리의 입향조는 『영가지(永嘉誌)』를 편찬한 용만(龍巒) 권기(權紀, 1546~1624)의 셋째 아들 후손이다. 정착 계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안동권씨가 처음에는 대사리와 접해 있는 지금의 길안면 송사리에서 3대 동안 살다가 4대에 이르러 대사리에 터전을 마련하였다고 한다. 이후 단양우씨 · 전주이씨 등과 함께 살고 있으며, 자연마을로는 공수 · 토일(吐日) · 사곡(寺谷) · 한절골 · 웃한절골 등이 있다.
공수는 공시골 · 공수번촌 · 공수촌으로도 불리며, 국도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작은 도로를 따라 오다가 제일 처음 맞이하는 마을이다. 마을을 이루고 있는 산의 형국이 공자(公字) 모양이라는 데서 마을 이름이 연유되었다고 한다. 고려시대에 공수전(公須田)이 있었다고 해서 공수골로 불렀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토일은 공수에서 1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안동권씨들이 많이 살고 있으며 아침해가 마을 뒷산에서 토하는 것 같다고 하여 토일(吐日)이라는 명칭이 붙여졌다고 한다. 마을 앞에는 길안천(吉安川)이 흐르고 있으며, 마을에는 『영가지』의 목판을 보관하고 있는 장판각(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24호)이 있다.
사곡은 사실뱅이 · 예사슬방 · 사슬방(沙瑟坊) 등으로 불리며, 토일에서 1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마을 앞에 낙동강 상류인 길안천이 흐르고 있는데 사금이 났다는 데서 연유하여 사곡으로 불렸다고 한다. 냇가에 모래가 많아서 사곡(沙谷)으로 부른다고 하며, 마을 주위에 절이 많았다고 하여 사곡(寺谷)이라고 부른다는 이야기도 있다.
한절골은 대사리 · 대사동(大寺里) · 중사(中寺) 등으로 불리며, 사곡에서 동쪽으로 1km 정도 떨어진 마을이다. 지금의 송제(松堤) 마을을 중심으로 이 일대가 고려시대에는 송천읍(松川邑)에 속했는데, 이곳에 큰 절이 있었기 때문에 절의 이름이 마을 명칭에 들어가게 되었다. 한절골은 단양우씨가 가장 먼저 입향하여 정착하였으며, 그 다음 밀양박씨가 들어왔다고 한다.
웃한절골은 상사리(上寺里)라고도 하며, 한절골에서 북쪽으로 1.5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마을 명칭은 한절골에서 약 2㎞ 북쪽 산골짜기에 올라가면 윗절이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며, 한절골의 위쪽에 있다고 하여 유래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마을은 경주김씨가 350여 년 전에 입향하였으며, 이후 옥천유씨 · 밀양박씨 등이 들어와서 살았다고 한다.
1913년 대사동에는 姜氏, 權氏, 金氏, 南氏, 朴氏, 白氏, 孫氏, 申氏, 愼氏, 沈氏, 安氏, 禹氏, 劉氏, 尹氏, 李氏, 林氏, 張氏, 崔氏, 韓氏, 黃氏 등 적어도 20개 이상의 성씨가 거주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가운데 權氏 · 金氏 · 禹氏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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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