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성주군 대가면(大家面) 흥산동(興山洞)토지조사부(土地調査簿)
흥산동(興山洞) 1988년 5월 각동을 리(里)로 개정함에 따라, 흥산리가 되었다. 구릉성 평지에 자리한 마을로, 경지가 넓게 분포하며 서남방향으로 낙동강의 지류가 흐른다. 신흥리 · 복천리 · 성양리 · 수산리 등을 병합하면서 신흥과 수산의 이름을 따서 흥산리로 부르게 되었다. 자연마을로는 탕실[탕곡(湯谷) · 신흥(新興)], 산막(山幕)[오두산막(烏頭山幕) · 신양(新陽)] 등이 있다.
탕실 마을은 산막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임진왜란 당시 경기도 포천에 살던 여제(旅齊) 백응상(白應祥)이 왜적의 해를 입은 부조(父祖)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의병을 일으켜 활약하다가 1599년(선조 32) 이곳으로 이거하여 마을을 개척하고, 새로 흥하는 마을이라 하여 신흥동이라 하였다. 그 후 중국 은나라 탕왕(湯王)이 ‘흰색(白)’을 숭상하여 백성에게 청백 정신을 함양하였다는 고사를 본받아 누대 백씨의 세거촌이라 하여 탕곡으로 고치고, 탕실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산막 마을은 흥산리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처음 정착할 때 산에 막을 치고 살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탕실 마을의 남쪽에 있으며, 오두산(烏頭山) 동편의 신양, 남쪽의 산막, 서남 대내 가까이 오산으로 구분된다. 선조 때 창녕에서 창녕인(昌寧人) 조석거(曺錫車)가 입향하였으며, 백천인(白川人) 참의(參議) 조원수(趙元壽)가 복거하였다. 순조 때 영주에서 반남인(潘南人) 수재(守齋) 박제하(朴齊夏)가 입향하여 그 후손들도 이곳에 살고 있다. 신양은 원래 탕실 마을이었으며, 화적이 자주 출몰하여 주민들이 현재의 탕실로 이거하여 비어있었다. 1979년 취락구조 개선 사업으로 산양 마을에서 12가구가 이주하여 새로 생긴 마을이다. 오산은 마을 뒷산이 까마귀 형상이라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문화유적으로는 경천재(景川齋)와 추양재(追養齋)가 있다. 경천재는 탕실 마을에 있으며 수원인(水原人) 회천(晦川) 백인웅(白仁雄)을 추모하는 재실이고, 추양재는 산막 마을의 박제하를 추모하는 재실이다.
1912년 흥산동에는 姜氏, 具氏, 金氏, 文氏, 閔氏, 朴氏, 裵氏, 白氏, 徐氏, 宋氏, 安氏, 吳氏, 李氏, 林氏, 張氏, 鄭氏, 趙氏, 蔡氏, 崔氏, 河氏, 韓氏 등 적어도 21개 이상의 성씨가 거주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가운데 白氏 · 趙氏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1934년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한 『조선의 성(朝鮮の姓)』에는 수원백씨 39호, 창녕조씨 25호가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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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