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6년 12월 9일, 국왕이 이원조를 자헌대부 공조판서에 임명하는 4품 이상 고신[敎旨]
내용 및 특징
1866년(고종 3) 12월 9일에 국왕이 이원조를 자헌대부 공조판서에 임명하는 4품 이상 고신[敎旨]이다. 발급일자 위에 ‘施命之寶’가 안보되어 있다.
자헌대부는 정2품 하계에 해당하는 품계명칭이다. 공조는 조선시대 육조의 하나로, 산림, 沼澤, 工匠, 건축, 陶窯工, 冶金 등에 관한 일들을 관장하던 관서이다. 관서의 장인 판서는 정2품직이다.
발급일자는 동치4년(고종 2) 12월 9일이다.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이 일자에 이원조가 공조판서에 제수된 기사는 없다. 대신 林永洙라는 인물이 공조판서에 임명된 기사만 발견된다.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짐작하건데 이날 이원조가 공조판서에 임명되고 당일에 바로 다른 인물로 체직된 것이 아닌가 한다.
이원조는 1809년(순조 9)에 문과에 급제하여 1818년(순조 18)까지 승문원 정자, 승문원 저작, 성균관 전적, 사헌부 감찰, 병조 좌랑 등을 역임하다가 낙향하였다. 그리고 1826년(순조 26) 4월에 성균관 직강으로 다시 벼슬 생활을 시작하여, 다음 달인 5월에 결성현감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그리고 1830(순조 30) 9월에 사간원 정언에 제수됨으로써 다시 중앙에서 벼슬을 하게 되었으나, 다음해 다시 낙향하였다. 이후 1841(헌종 7)년 제주목사에 임명되면서부터 당상관의 반열에 들어섰고, 이어서 형조참의, 승정원 좌승지, 지산도호부사, 경주부윤, 대사간, 동지의금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1864년(고종 1) 병조참판에, 1865년(고종 2) 1월에 한성부 판윤에 제수되었고, 같은 해 2월에 이 고신과 같이 지춘추관사와 지의금부사를 겸임하게 되었다. 그리고 1866년(고종 3) 12월에 이 고신과 같이 공조판서에 제수되었다.
이원조(1792~1871)는 자가 周賢이며, 호는 凝窩이다. 초명은 李永祚이고, 1812년에 개명하였다. 생원 李亨鎭의 아들로 태어나 백부 李奎鎭의 양자가 되었다. 18세에 증광문과에 급제하였고, 제주목사, 한성판윤, 공조판서, 판의금부사 등을 역임하여, 조선후기 노론 집권기에 남인으로서는 드물게 1품의 반열에 올랐다. 학문적으로는 영남 주리론 계열의 대표적인 학자로서 鄭宗魯와 柳致明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의 성리학 사상은 조카 李震相에게 전해졌다.
배재홍, 『退溪學과 韓國文化』39, 경북대 퇴계학 연구소, 2006
鄭求福, 『古文書硏究』 9·10, 한국고문서학회, 1996
유지영, 『古文書硏究』 30, 한국고문서학회, 2007
『승정원일기』,
『응와 선생 문집』,
명경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