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5년 1월 12일, 국왕이 이원조를 자헌대부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임명하는 4품 이상 고신[敎旨]
내용 및 특징
1865년(고종 2) 1월 12일에 국왕이 이원조를 자헌대부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임명하는 4품 이상 고신[敎旨]이다. 발급일자 위에 ‘施命之寶’가 안보되어 있다.
오위도총부는 조선전기에는 오위를 총괄하던 최고 군령기관기관이었다. 그러나 조선후기에는 오위의 군사적 기능이 유명무실화되고, 비변사가 군국기무를 전담하면서, 오위도총부는 점차 기능을 상실하고 법제상의 관부로만 남게 되었다. 도총관은 오위도총부의 최고 관직으로 정2품직이었다. 정원은 종2품직인 부총관과 합쳐서 10인이었고, 모두 다른 관직이 겸직하였다. 이원조는 1865년(고종 2) 1월 19일에 한성부 판윤이 되었고, 여기에 도총관을 겸직하게 된 것이다.
발급일자는 동치 4년(고종 2) 1월이다.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같은 해 1월 22일에 병조판서 金炳冀가 참석한 가운데 정사를 열었고, 이원조가 도총관에 임명되었다.
이원조는 1809년(순조 9)에 문과에 급제하여 1818년(순조 18)까지 승문원 정자, 승문원 저작, 성균관 전적, 사헌부 감찰, 병조 좌랑 등을 역임하다가 낙향하였다. 낙향한 이후 사헌부 지평, 병조 정랑, 사간원 정언 등에 제수되었으나, 계속 지방에 머물면서 나아가지 않았다. 그리고 1826년(순조 26) 4월에 성균관 직강으로 다시 벼슬 생활을 시작하여, 다음 달인 5월에 결성현감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그리고 1830(순조 30) 9월에 사간원 정언에 제수됨으로써 다시 중앙에서 벼슬을 하게 되었고, 10월에 성균관 전적에 임명되어 공무를 수행하였다. 그러나 다음해 다시 낙향하였다. 이후 1841(헌종 7)년 제주목사에 임명되면서부터 당상관의 반열에 들어섰고, 이어서 형조참의, 승정원 좌승지, 지산도호부사, 경주부윤, 대사간, 동지의금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1864년(고종 1) 병조참판에 제수되었다가 다음해 1월에 체직되고, 1865년(고종 2) 1월에 한성부 판윤에 임명되었으며, 이 고신과 같이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겸직하였다.
이원조(1792~1871)는 자가 周賢이며, 호는 凝窩이다. 초명은 李永祚이고, 1812년에 개명하였다. 생원 李亨鎭의 아들로 태어나 백부 李奎鎭의 양자가 되었다. 18세에 증광문과에 급제하였고, 제주목사, 한성판윤, 공조판서, 판의금부사 등을 역임하여, 조선후기 노론 집권기에 남인으로서는 드물게 1품의 반열에 올랐다. 학문적으로는 영남 주리론 계열의 대표적인 학자로서 鄭宗魯와 柳致明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의 성리학 사상은 조카 李震相에게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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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
『응와 선생 문집』,
명경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