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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5년 이원조(李源祚) 고신(告身)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K05+KSM-XA.1865.1100-20130630.E47840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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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교령류-고신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정치/행정-임면-고신
작성주체 고종, 이원조
작성지역 서울특별시
작성시기 1865
형태사항 크기: 53 X 74.5
장정: 낱장
수량: 1장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성주 한개 성산이씨 응와종택 /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안내정보

1865년 이원조(李源祚) 고신(告身)
1865년(고종 2) 2월, 국왕이 이원조자헌대부 한성부 판윤 겸 지춘추관사에 임명하는 4품 이상 고신(敎旨)이다. 이원조1809년 문과에 급제하여 1818년까지 승문원 정자를 비롯한 여러 관직을 역임하다가 낙향하였다. 낙향한 이후 사헌부 지평 등 여러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계속 지방에 머물면서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다가 1826년 4월 성균관 직강으로 다시 벼슬 생활을 시작하여, 다음 달인 5월에 결성현감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1830 사간원 정언에 제수됨으로써 다시 중앙에서 벼슬을 하게 되었고, 10월에 성균관 전적에 임명되어 공무를 수행하였다. 그러나 다음해 다시 낙향하였다. 이후 1841제주목사에 임명되면서부터 당상관의 반열에 들어섰다. 1865년 1월 한성부 판윤에 제수되었고, 2월에는 이 고신과 같이 지춘추관사를 겸임하게 되었다.
배재홍, 『退溪學과 韓國文化』39, 경북대 퇴계학 연구소, 2006
鄭求福, 『古文書硏究』 9·10, 한국고문서학회, 1996
유지영, 『古文書硏究』 30, 한국고문서학회, 2007
『승정원일기』,
『응와 선생 문집』,
명경일

상세정보

1865년 2월, 국왕이 이원조자헌대부 한성부 판윤 겸 지춘추관사에 임명하는 4품 이상 고신[敎旨]
내용 및 특징
1865년(고종 2) 2월에 국왕이 이원조자헌대부 한성부 판윤 겸 지춘추관사에 임명하는 4품 이상 고신[敎旨]이다. 발급일자 위에 ‘施命之寶’가 안보되어 있다.
한성부 판윤은 조선의 도성인 한성부의 최고위 관직으로 정원은 1인이다. 춘추관은 조선시대에 역사기록을 관장한 관서이다. 춘추관의 관직은 문과출신만 임명하게 되어있었으며, 모두 다른 관청의 관원이 겸직하였다. 춘추관에 소속된 관직 가운데 知事지춘추관사는 정2품직으로 정원이 2인이었다. 자헌대부는 정2품 하계에 해당하는 품계 명칭이다.
발급일자는 동치 4년(고종 2) 2월이다.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1월 30일에 이조판서 姜時永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政事에서 이원조지춘추관사에 임명하기로 결정되었다.
뒷면 좌측 하단에는 ‘吏吏安奎澈’이라고 적혀있다. ‘吏吏’는 ‘이조의 서리’라는 의미이고, ‘安奎澈’은 문서를 작성한 서리의 성명이다. 이와 같이 고신에는 뒷면 좌측하단에 문서 작성자가 기입되어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성주 이씨 이원조 가문이 소장하고 있는 고신의 뒷부분을 보면, 안규철뿐 아니라 ‘安宇成’, ‘安處得’, ‘安宙成’, ‘安至默’, ‘安鍾允’, ‘安允鼎’ 등 안씨 성을 가진 서리의 이름이 연속적으로 등장한다. 이는 이조에 근무하는 서리 가운데 안씨 성이 대를 이어 성산이씨 가문의 단골서리 역할을 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짐작된다.
이원조1809년(순조 9)에 문과에 급제하여 1818년(순조 18)까지 승문원 정자, 승문원 저작, 성균관 전적, 사헌부 감찰, 병조 좌랑 등을 역임하다가 낙향하였다. 그리고 1826년(순조 26) 4월에 성균관 직강으로 다시 벼슬 생활을 시작하여, 다음 달인 5월에 결성현감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그리고 1830(순조 30) 9월에 사간원 정언에 제수됨으로써 다시 중앙에서 벼슬을 하게 되었으나, 다음해 다시 낙향하였다. 이후 1841(헌종 7)년 제주목사에 임명되면서부터 당상관의 반열에 들어섰고, 이어서 형조참의, 승정원 좌승지, 지산도호부사, 경주부윤, 대사간, 동지의금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1864년(고종 1) 병조참판에, 1865년(고종 2) 1월에 한성부 판윤에 제수되었고, 같은 해 2월에는 이 고신과 같이 지춘추관사를 겸임하게 되었다.
이원조(1792~1871)는 자가 周賢이며, 호는 凝窩이다. 초명은 李永祚이고, 1812년에 개명하였다. 생원 李亨鎭의 아들로 태어나 백부 李奎鎭의 양자가 되었다. 18세에 증광문과에 급제하였고, 제주목사, 한성판윤, 공조판서, 판의금부사 등을 역임하여, 조선후기 노론 집권기에 남인으로서는 드물게 1품의 반열에 올랐다. 학문적으로는 영남 주리론 계열의 대표적인 학자로서 鄭宗魯柳致明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의 성리학 사상은 조카 李震相에게 전해졌다.
배재홍, 『退溪學과 韓國文化』39, 경북대 퇴계학 연구소, 2006
鄭求福, 『古文書硏究』 9·10, 한국고문서학회, 1996
유지영, 『古文書硏究』 30, 한국고문서학회, 2007
『승정원일기』,
『응와 선생 문집』,
명경일

이미지

원문 텍스트

1865년 이원조(李源祚) 고신(告身)

敎旨
李源祚資憲
大夫漢城府判
尹兼知春秋館

同治四年二月日
吏吏安奎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