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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5년 이원조(李源祚) 고신(告身)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K05+KSM-XA.1865.1100-20130630.E47840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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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교령류-고신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정치/행정-임면-고신
작성주체 고종, 이원조
작성지역 서울특별시
작성시기 1865
형태사항 크기: 54 X 74.5
장정: 낱장
수량: 1장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성주 한개 성산이씨 응와종택 /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안내정보

1865년 이원조(李源祚) 고신(告身)
1865년(고종 2) 1월, 국왕이 이원조가선대부 행 용양위 호군에 임명하는 4품 이상 고신(敎旨)이다. 이원조1809년 문과에 급제한 이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다가 1841제주목사에 임명되면서부터 당상관의 반열에 들어섰다. 1864병조참판에 제수되었다가 다음해 1월에 체직된 이원조에게 서반체아직인 용양위 호군을 내려졌다. 서반체아직은 녹봉만 지급하고 실제의 직무가 없는 산직이다. 조선후기에는 세조대 이래 당상관의 수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퇴직한 당상관과 불가피하게 관직을 주어야 할 사람이 늘어 관원의 생활보장을 서반체아에서 구하게 되었다.
배재홍, 『退溪學과 韓國文化』39, 경북대 퇴계학 연구소, 2006
鄭求福, 『古文書硏究』 9·10, 한국고문서학회, 1996
유지영, 『古文書硏究』 30, 한국고문서학회, 2007
『승정원일기』,
『응와 선생 문집』,
명경일

상세정보

1865년(고종 2) 1월, 국왕이 이원조가선대부 행 용양위 호군에 임명하는 4품 이상 고신[敎旨]
내용 및 특징
1865년(고종 2) 1월에 국왕이 이원조가선대부 행 용양위 호군에 임명하는 4품 이상 고신[敎旨]이다. 발급일자 위에 ‘施命之寶’가 안보되어 있다.
가선대부는 종2품 하계에 해당하는 품계명칭이다. 용양위는 조선시대 군사조직인 五衛의 하나이고, 대호군은 오위 소속의 서반체아직으로 종3품직이다. 조선후기에 와서는 오위가 유명무실화되고, 대호군과 같은 오위의 군직에 문무관 및 음관이었던 자를 임명하였다. 따라서 서반체아직은 녹봉만 지급하고 실제의 직무가 없는 散職으로 변하였다. 결국 조선후기에는 서반체아직의 숫자가 정직의 4, 5배나 되었으며, 이미 군직의 성격은 거의 사라지고 양반층의 未官者나 한산자의 벼슬자리 역할만 하고 있었다. 이렇게 서반체아직의 성격이 변한 이유는 세조대 직전법의 실시로 동반의 산관마저 토지의 지급이 없어지자, 관원의 생활보장을 서반체아에서 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세조대 이래 당상관의 수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퇴직한 당상관과 불가피하게 관직을 주어야 할 사람이 늘어난 것도 서반체아직이 산직으로 변질된 이유이다.
발급일자는 동치4년(고종 2) 1월이다.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이원조는 전년인 고종 1년 12월 2일에 병조참판에 제수되어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해 1월 2일에 병조참판에서 체직되었는데, 이원조에게 서반체아직인 용양위 호군을 내려준 것이다.
이원조1809년(순조 9)에 문과에 급제하여 1818년(순조 18)까지 승문원 정자, 승문원 저작, 성균관 전적, 사헌부 감찰, 병조 좌랑 등을 역임하다가 낙향하였다. 낙향한 이후 사헌부 지평, 병조 정랑, 사간원 정언 등에 제수되었으나, 계속 지방에 머물면서 나아가지 않았다. 그리고 1826년(순조 26) 4월에 성균관 직강으로 다시 벼슬 생활을 시작하여, 다음 달인 5월에 결성현감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그리고 1830(순조 30) 9월에 사간원 정언에 제수됨으로써 다시 중앙에서 벼슬을 하게 되었고, 10월에 성균관 전적에 임명되어 공무를 수행하였다. 그러나 다음해 다시 낙향하였다. 이후 1841(헌종 7)년 제주목사에 임명되면서부터 당상관의 반열에 들어섰고, 이어서 형조참의, 승정원 좌승지, 지산도호부사, 경주부윤, 대사간, 동지의금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1864년(고종 1) 병조참판에 제수되었다가 다음해 1월에 체직되었다.
이원조(1792~1871)는 자가 周賢이며, 호는 凝窩이다. 초명은 李永祚이고, 1812년에 개명하였다. 생원 李亨鎭의 아들로 태어나 백부 李奎鎭의 양자가 되었다. 18세에 증광문과에 급제하였고, 제주목사, 한성판윤, 공조판서, 판의금부사 등을 역임하여, 조선후기 노론 집권기에 남인으로서는 드물게 1품의 반열에 올랐다. 학문적으로는 영남 주리론 계열의 대표적인 학자로서 鄭宗魯柳致明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의 성리학 사상은 조카 李震相에게 전해졌다.
배재홍, 『退溪學과 韓國文化』39, 경북대 퇴계학 연구소, 2006
鄭求福, 『古文書硏究』 9·10, 한국고문서학회, 1996
유지영, 『古文書硏究』 30, 한국고문서학회, 2007
『승정원일기』,
『응와 선생 문집』,
명경일

이미지

원문 텍스트

1865년 이원조(李源祚) 고신(告身)

敎旨
李源祚
嘉善大夫
行龍驤衛
護軍

同治四年正月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