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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7년 이원조(李源祚) 고신(告身)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K05+KSM-XA.1857.1100-20130630.E4784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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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교령류-고신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정치/행정-임면-고신
작성주체 철종, 이원조
작성지역 서울특별시
작성시기 1857
형태사항 크기: 54 X 73.5
장정: 낱장
수량: 1장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성주 한개 성산이씨 응와종택 /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안내정보

1857년 이원조(李源祚) 고신(告身)
1857년 12월 국왕이이원조가선대부 행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 참찬관 춘추관 수찬관으로 임명하는 문서이다.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12월 24일 이유응이 해임되었다. 국왕은 정사를 열지 않고 이전에 후보에 올랐던 인물 가운데 이원조를 그 자리에 임명하였다.
배재홍, 『退溪學과 韓國文化』39, 경북대 퇴계학 연구소, 2006
鄭求福, 『古文書硏究』 9·10, 한국고문서학회, 1996
유지영, 『古文書硏究』 30, 한국고문서학회, 2007
『승정원일기』,
『응와 선생 문집』,
김순주

상세정보

1857년(철종 8) 12월, 국왕이 李源祚嘉善大夫 行 承政院 左承旨 兼 經筵 參贊官 春秋館 修撰官으로 임명하는 4품 이상 고신[敎旨]
내용 및 특징
1857년(철종 8) 12월 국왕이 이원조가선대부 행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 수찬관으로 임명하는 4품 이상 고신[敎旨]이다. 발급일자 위에 ‘施命之寶’가 답인되어 있다.
가선대부는 종2품 하계에 해당하는 품계이다. 승정원은 왕명출납을 관장하던 관청으로, 政院 · 喉院 · 銀臺 · 代言司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도승지 · 좌승지 · 우승지 · 좌부승지 · 우부승지 · 동부승지 각 1인씩 모두 6인의 승지가 있으며, 이들은 모두 정3품 당상관이다. 경연은 임금에게 유학의 경서를 강론하는 것으로, 經幄 또는 經帷라고도 한다. 임금에게 經史를 가르쳐 유교의 이상정치를 실현하려는 것이 목적이었으나, 실제로는 왕권행사를 규제하는 역할을 하였다. 참찬관은 경연의 정3품직으로 知事 · 同知事를 보좌하는 임무를 맡았다. 정원은 승지 6員과 부제학이 겸한 참찬관 1員을 합하여 총 7員이다. 춘추관은 時政의 기록을 관장한 관서이다. 춘추관 직제는 영사(영의정이 겸임) 1인, 監事(좌·우의정이 겸임) 2인, 정2품 지사 2인, 종2품 동지사 2인, 정3품 당상관 수찬관, 편수관(정3품 堂下官∼종4품), 기주관(정5품·종5품), 기사관(정6품∼정9품)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모두 문관이며, 다른 관부의 관원이 겸하였다. 行守法은 품계와 관직이 일치하지 않은 관원에게 주던 칭호이다. 관직이 품계보다 낮은 경우를 ‘行’, 관직이 품계보다 높은 경우를 ‘守’라 하였다.
국왕이 교지를 내린 달은 함풍 7년(철종 8) 12월이었다.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12월 24일 李裕膺이 체직되어 이원조승지로 임명하였다. 국왕은 정사를 열지 않고 이전에 망단자에 올랐던 후보자들 중에서 낙점하도록 하여, 이원조좌승지에 임명하였다. 경연 참찬관 춘추관 수찬관을 겸직하였다.
뒷면 좌측 하단에는 ‘吏吏安奎澈’이라고 적혀있다. ‘吏吏’는 ‘이조의 서리’라는 의미이고, ‘安奎澈’은 문서를 작성한 서리의 성명이다. 이와 같이 고신에는 뒷면 좌측하단에 문서 작성자가 기입되어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성주 이씨 이원조 가문이 소장하고 있는 고신의 뒷부분을 보면, 안규철뿐 아니라 ‘安宇成’, ‘安處得’, ‘安宙成’, ‘安至默’, ‘安鍾允’, ‘安允鼎’ 등 안씨 성을 가진 서리의 이름이 연속적으로 등장한다. 이는 이조에 근무하는 서리 가운데 안씨 성이 대를 이어 성산이씨 가문의 단골서리 역할을 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짐작된다.
이원조1809년 문과에 급제하고, 이후 승문원 박사에 임명이 된다. 그 후 여러 관직을 거쳐 1853년 9월부터 1855년까지 승지대사간의 관직에 파직과 서용을 반복하였다. 1856년 8월 이원조대사간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10월 부총관으로 임명되었고 종2품 가선대부로 加資되었다. 22일 政事를 열어 이원조兵曹參判에 임명하였다.
이원조(1792~1871)는 자가 周賢이며, 호는 凝窩이다. 초명은 李永祚이고, 1812년에 개명하였다. 생원 李亨鎭의 아들로 태어나 백부 李奎鎭의 양자가 되었다. 18세에 증광문과에 급제하였고, 제주목사, 한성판윤, 공조판서, 판의금부사 등을 역임하여, 조선후기 노론 집권기에 남인으로서는 드물게 1품의 반열에 올랐다. 학문적으로는 영남 주리론 계열의 대표적인 학자로서 鄭宗魯柳致明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의 성리학 사상은 조카 李震相에게 전해졌다.
배재홍, 『退溪學과 韓國文化』39, 경북대 퇴계학 연구소, 2006
鄭求福, 『古文書硏究』 9·10, 한국고문서학회, 1996
유지영, 『古文書硏究』 30, 한국고문서학회, 2007
『승정원일기』,
『응와 선생 문집』,
김순주

이미지

원문 텍스트

1857년 이원조(李源祚) 고신(告身)

敎旨
李源祚嘉善大
夫行承政院左承
旨兼經筵參贊官
春秋館修撰官

咸豊七年十二月日
吏吏安奎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