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4년(철종 5) 12월, 국왕이 李源祚를 通政大夫 司諫院 大司諫으로 임명하는 4품 이상 고신[敎旨]
내용 및 특징
1856년(철종 7) 10월 국왕이 李源祚를 嘉善大夫 兵曹參判으로 임명하는 4품 이상 고신[敎旨]이다. 발급일자 위에 ‘施命之寶’가 답인되어 있다.
가선대부는 조선시대 종2품 하계에 해당하는 품계이다. 병조는 군사관계 업무를 총괄하고, 육조의 하나로 夏官·西銓이라고도 한다. 병조의 관원으로는 장관인 정2품의 판서와 그 아래 종2품의 참판, 정3품인 참의 및 참지가 각각 1인씩, 모두 4인의 당상관이 있다. 참판은 육조의 종2품 관직이다. 각 조에 1員이 있어 육조의 장관인 판서를 正卿이라 하였고 차관으로서 참판을 亞卿이라 하였다.
국왕이 교지를 내린 날은 함풍 6년(철종 7) 10월 22일이다.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이 날에 이조참판 任百秀가 참석한 가운데 政事를 열어 이원조를 兵曹參判으로 임명하였다.
뒷면 좌측 하단에는 ‘吏吏安奎澈’이라고 적혀있다. ‘吏吏’는 ‘이조의 서리’라는 의미이고, ‘安奎澈’은 문서를 작성한 서리의 성명이다. 이와 같이 고신에는 뒷면 좌측하단에 문서 작성자가 기입되어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성주 이씨 이원조 가문이 소장하고 있는 고신의 뒷부분을 보면, 안규철뿐 아니라 ‘安宇成’, ‘安處得’, ‘安宙成’, ‘安至默’, ‘安鍾允’, ‘安允鼎’ 등 안씨 성을 가진 서리의 이름이 연속적으로 등장한다. 이는 이조에 근무하는 서리 가운데 안씨 성이 대를 이어 성산이씨 가문의 단골서리 역할을 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짐작된다.
이원조는 1809년 문과에 급제하고, 이후 승문원 박사에 임명되었다. 그 후 여러 관직을 거쳐 1853년 9월부터 1855년까지 승지와 대사간의 관직에 파직과 서용을 반복하였다. 1856년 8월에 이원조는 대사간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10월 부총관으로 임명되었고 종2품 가선대부로 加資되었다.
이원조(1792~1871)는 자가 周賢이며, 호는 凝窩이다. 초명은 李永祚이고, 1812년에 개명하였다. 생원 李亨鎭의 아들로 태어나 백부 李奎鎭의 양자가 되었다. 18세에 증광문과에 급제하였고, 제주목사, 한성판윤, 공조판서, 판의금부사 등을 역임하여, 조선후기 노론 집권기에 남인으로서는 드물게 1품의 반열에 올랐다. 학문적으로는 영남 주리론 계열의 대표적인 학자로서 鄭宗魯와 柳致明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의 성리학 사상은 조카 李震相에게 전해졌다.
배재홍, 『退溪學과 韓國文化』39, 경북대 퇴계학 연구소, 2006
鄭求福, 『古文書硏究』 9·10, 한국고문서학회, 1996
유지영, 『古文書硏究』 30, 한국고문서학회, 2007
『승정원일기』,
『응와 선생 문집』,
김순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