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4년(철종 5) 12월, 국왕이 李源祚를 通政大夫 司諫院 大司諫으로 임명하는 4품 이상 고신[敎旨]
내용 및 특징
1854년(철종 5) 12월 국왕이 李源祚를 通政大夫 司諫院 大司諫으로 임명하는 4품 이상 고신[敎旨]이다. 발급일자 위에 ‘施命之寶’가 답인되어 있다.
통정대부는 정3품 上階에 해당하는 품계명이다. 사간원은 諫諍·論駁을 관장하던 관서로 諫院 · 薇院이라고도 하였다. 관원은 諫官이라고 하며, 사헌부의 관원인 臺官과 병칭해 臺諫이라 한다. 대사간은 사간원의 정3품 당상관직으로 大諫 · 諫長이라고도 하였으며 정원은 1員이다.
국왕이 교지를 내린 날은 함풍 4년(철종 5) 12월 12일이다.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이날 참판 李謙在, 참의 宋進洙가 참석한 가운데 政事를 열어 이원조를 대사간에 임명하였다.
뒷면 좌측 하단에는 ‘吏吏安奎澈’이라고 적혀있다. ‘吏吏’는 ‘이조의 서리’라는 의미이고, ‘安奎澈’은 문서를 작성한 서리의 성명이다. 이와 같이 고신에는 뒷면 좌측하단에 문서 작성자가 기입되어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성주 이씨 이원조 가문이 소장하고 있는 고신의 뒷부분을 보면, 안규철뿐 아니라 ‘安宇成’, ‘安處得’, ‘安宙成’, ‘安至默’, ‘安鍾允’, ‘安允鼎’ 등 안씨 성을 가진 서리의 이름이 연속적으로 등장한다. 이는 이조에 근무하는 서리 가운데 안씨 성이 대를 이어 성주이씨 가문의 단골서리 역할을 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짐작된다.
이원조는 1809년 문과에 급제하고, 이후 승문원 박사에 임명된다. 그 후 여러 번의 파직과 서용으로 여러 관직을 거쳤고 1853년 9월 좌승지에 임명된다. 같은 해 10월 승정원 내 좌차조정에 따라 좌부승지가 되었다가 다음날 좌부승지와 우부승지가 체직됨으로써 그는 다시 좌승지가 되었다. 1854년 10월 20일 승지 이원조가 경연에 참석하지 않아 파직되고, 12월 서반체아직인 절충장군 행 용양위 부호군이 되었다.
이원조(1792~1871)는 자가 周賢이며, 호는 凝窩이다. 초명은 李永祚이고, 1812년에 개명하였다. 생원 李亨鎭의 아들로 태어나 백부 李奎鎭의 양자가 되었다. 18세에 증광문과에 급제하였고, 제주목사, 한성판윤, 공조판서, 판의금부사 등을 역임하여, 조선후기 노론 집권기에 남인으로서는 드물게 1품의 반열에 올랐다. 학문적으로는 영남 주리론 계열의 대표적인 학자로서 鄭宗魯와 柳致明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의 성리학 사상은 조카 李震相에게 전해졌다.
배재홍, 『退溪學과 韓國文化』39, 경북대 퇴계학 연구소, 2006
鄭求福, 『古文書硏究』 9·10, 한국고문서학회, 1996
유지영, 『古文書硏究』 30, 한국고문서학회, 2007
『승정원일기』,
『응와 선생 문집』,
김순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