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3년(철종 4) 9월, 국왕이 李源祚를 通政大夫 承政院 左承旨 兼 經筵參贊官 春秋館 修撰官으로 임명하는 4품 이상 고신[敎旨]
내용 및 특징
1853년(철종 4) 9월 국왕이 이원조를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 참찬관 춘추관 수찬관으로 임명하는 4품 이상 고신[敎旨]이다. 발급일자 위에 ‘施命之寶’가 답인되어 있다.
통정대부는 정3품 上階에 해당하는 품계이다. 승정원은 왕명출납을 관장하던 관청으로, 政院 · 喉院 · 銀臺 · 代言司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도승지 · 좌승지 · 우승지 · 좌부승지 · 우부승지 · 동부승지 각 1인씩 모두 6인의 승지가 있으며, 이들은 모두 정3품 당상관이었다. 경연은 임금에게 유학의 경서를 강론하는 일로, 經幄 또는 經帷라고도 한다. 임금에게 經史를 가르쳐 유교의 이상정치를 실현하려는 것이 목적이었으나, 실제로는 왕권행사를 규제하는 역할을 하였다. 참찬관은 경연의 정3품직으로 知事 · 同知事를 보좌하는 임무를 맡았다. 정원은 승지 6員과 부제학이 겸한 참찬관 1員을 합하여 총 7員이다. 춘추관은 時政의 기록을 관장한 관서이다. 춘추관 직제는 영사(영의정이 겸임) 1인, 監事(좌·우의정이 겸임) 2인, 정2품 지사 2인, 종2품 동지사 2인, 정3품 당상관 수찬관, 편수관(정3품 堂下官∼종4품), 기주관(정5품·종5품), 기사관(정6품∼정9품)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모두 문관으로 임용하되, 다른 관부의 관원이 겸하도록 하였다.
국왕이 교지를 내린 날은 함풍 3년(철종 4) 9월이다. 『일성록』에 의하면 9월 27일 洪淳穆이 승지에서 체직되었다. 국왕은 정사를 열지 않고 이전에 망단자에 올랐던 후보자들 중에서 낙점하도록 하였다. 이에 이원조가 좌승지에 임명되었고, 경연 참찬관 춘추관 수찬관을 겸하였다.
뒷면 좌측 하단에는 ‘吏吏安奎澈’이라고 적혀있다. ‘吏吏’는 ‘이조의 서리’라는 의미이고, ‘安奎澈’은 문서를 작성한 서리의 성명이다. 이와 같이 고신에는 뒷면 좌측하단에 문서 작성자가 기입되어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성주 이씨 이원조 가문이 소장하고 있는 고신의 뒷부분을 보면, 안규철뿐 아니라 ‘安宇成’, ‘安處得’, ‘安宙成’, ‘安至默’, ‘安鍾允’, ‘安允鼎’ 등 안씨 성을 가진 서리의 이름이 연속적으로 등장한다. 이는 이조에 근무하는 서리 가운데 안씨 성이 대를 이어 성주이씨 가문의 단골서리 역할을 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짐작된다.
이원조는 1809년 문과에 급제하고, 이후 승문원 박사에 임명되었다. 그 후 여러 번의 파직과 서용을 반복하여 여러 관직을 거쳤고 1849년 4월 21일 경주부윤에 임명되었고, 1851년 10월 서반체아직인 절충장군 행 용양위 부호군에, 1852년 12월 대사간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1853년 1월 다시 절충장군 행 용양위 부호군이 된 것으로 보아 지방에 있다는 이유로 체직되어 부임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원조(1792~1871)는 자가 周賢이며, 호는 凝窩이다. 초명은 李永祚이고, 1812년에 개명하였다. 생원 李亨鎭의 아들로 태어나 백부 李奎鎭의 양자가 되었다. 18세에 증광문과에 급제하였고, 제주목사, 한성판윤, 공조판서, 판의금부사 등을 역임하여, 조선후기 노론 집권기에 남인으로서는 드물게 1품의 반열에 올랐다. 학문적으로는 영남 주리론 계열의 대표적인 학자로서 鄭宗魯와 柳致明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의 성리학 사상은 조카 李震相에게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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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
『응와 선생 문집』,
『일성록』,
김순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