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2년(철종 3) 12월, 국왕이 李源祚를 通政大夫 司諫院 大司諫으로 임명하는 4품 이상 고신[敎旨]
내용 및 특징
1852년(철종 3) 12월 국왕이 이원조를 통정대부 사간원 대사간으로 임명하는 4품 이상 고신[敎旨]이다. 발급일자 위에 ‘施命之寶’가 답인되어 있다.
통정대부는 정3품 上階에 해당하는 품계이다. 사간원은 諫諍·論駁을 관장하던 관서로 諫院 또는 薇院이라고도 하였다. 관원은 諫官이라고 하며, 사헌부의 관원인 臺官과 병칭해 臺諫이라 한다. 대사간은 사간원의 정3품 당상관직으로 大諫 또는 諫長이라고도 하였다. 1員이 정원이었다.
국왕이 교지를 내린 날은 함풍 2년(철종3) 12월 24일이다. 『일성록』에 의하면 이 일자에 이조판서 金洙根, 참의 徐元淳, 병조판서 李鶴秀가 참석한 가운데 政事를 열어 이원조를 대사간으로 임명 하였다.
뒷면 좌측 하단에는 ‘吏吏安奎澈’이라고 적혀있다. ‘吏吏’는 ‘이조의 서리’라는 의미이고, ‘安奎澈’은 문서를 작성한 서리의 성명이다. 이와 같이 고신에는 뒷면 좌측하단에 문서 작성자가 기입되어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성주 이씨 이원조 가문이 소장하고 있는 고신의 뒷부분을 보면, 안규철뿐 아니라 ‘安宇成’, ‘安處得’, ‘安宙成’, ‘安至默’, ‘安鍾允’, ‘安允鼎’ 등 안씨 성을 가진 서리의 이름이 연속적으로 등장한다. 이는 이조에 근무하는 서리 가운데 안씨 성이 대를 이어 성산이씨 가문의 단골서리 역할을 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짐작된다.
이원조는 1809년 문과에 급제하고, 이후 승문원 박사에 임명된다. 그 후 여러 번의 파직과 서용을 반복하여 여러 관직을 거쳤다. 1849년 4월 21일 경주부윤임명되었고, 1851년 10월에 서반체아직인 절충장군 행 용양위 부호군의 벼슬을 받았다.
이원조(1792~1871)는 자가 周賢이며, 호는 凝窩이다. 초명은 李永祚이고, 1812년에 개명하였다. 생원 李亨鎭의 아들로 태어나 백부 李奎鎭의 양자가 되었다. 18세에 증광문과에 급제하였고, 제주목사, 한성판윤, 공조판서, 판의금부사 등을 역임하여, 조선후기 노론 집권기에 남인으로서는 드물게 1품의 반열에 올랐다. 학문적으로는 영남 주리론 계열의 대표적인 학자로서 鄭宗魯와 柳致明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의 성리학 사상은 조카 李震相에게 전해졌다.
배재홍, 『退溪學과 韓國文化』39, 경북대 퇴계학 연구소, 2006
鄭求福, 『古文書硏究』 9·10, 한국고문서학회,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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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
『응와 선생 문집』,
『일성록』,
김순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