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1년(철종 2) 10월, 국왕이 李源祚를 折衝將軍 行 龍驤衛 副護軍으로 임명하는 4품 이상 고신[敎旨]
내용 및 특징
1851년(철종 2) 10월 국왕이 이원조를 절충장군 행 용양위 부호군으로 임명하는 4품 이상 고신[敎旨]이다. 발급일자 위에 ‘施命之寶’가 답인되어 있다.
절충장군은 무신 정3품 당상관의 품계이고, 용양위 부호군은 五衛의 종4품 관직이다. 부호군은 1467년 관제개혁 때 攝護軍에서 부호군으로 개칭되었다. 하지만 직전법의 실시와 조선후기 오위의 기능이 유명무실화되면서 군직의 성격은 사라지고 양반층의 未官者나 한산자의 벼슬자리로 변한다. 즉 문·무관의 보직이 없는 자, 혹은 親功臣·功臣嫡長, 여러 잡직 등이 부호군에 임명된 것이다. 또한 품계가 정3품이고 관직이 종4품이기 때문에 行守法에 의거하여 ‘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국왕이 교지를 내린 것은 함풍 원년 10월이다. 『일성록』에 의하면 10월 3일 이원조의 관직을 전 경주 부윤이라고 하였다. 이에 관직이 없기 때문에 서반체아직인 절충장군 행 용양위 부호군을 받았다.
이원조는 1809년 문과에 급제하고, 이후 승문원 박사에 임명된다. 그 후 여러 번의 파직과 서용을 반복하여 여러 관직을 거쳤고 1849년 4월 21일 경주부윤임명되었다.
이원조(1792~1871)는 자가 周賢이며, 호는 凝窩이다. 초명은 李永祚이고, 1812년에 개명하였다. 생원 李亨鎭의 아들로 태어나 백부 李奎鎭의 양자가 되었다. 18세에 증광문과에 급제하였고, 제주목사, 한성판윤, 공조판서, 판의금부사 등을 역임하여, 조선후기 노론 집권기에 남인으로서는 드물게 1품의 반열에 올랐다. 학문적으로는 영남 주리론 계열의 대표적인 학자로서 鄭宗魯와 柳致明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의 성리학 사상은 조카 李震相에게 전해졌다.
배재홍, 『退溪學과 韓國文化』39, 경북대 퇴계학 연구소, 2006
鄭求福, 『古文書硏究』 9·10, 한국고문서학회, 1996
유지영, 『古文書硏究』 30, 한국고문서학회, 2007
『승정원일기』,
『응와 선생 문집』,
『일성록』,
김순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