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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9년 이원조(李源祚) 고신(告身)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K05+KSM-XA.1849.1100-20130630.E4784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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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교령류-고신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정치/행정-임면-고신
작성주체 헌종, 이원조
작성지역 서울특별시
작성시기 1849
형태사항 크기: 55 X 75.5
장정: 낱장
수량: 1장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성주 한개 성산이씨 응와종택 /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안내정보

1849년 이원조(李源祚) 고신(告身)
1849년 4월, 국왕이 이원조겸 경주진 병마첨절제사에 임명하는 문서이다. 경주진 병마첨절제사는 종3품 무관직으로 경주진을 관리하였으며 경주 부윤이 직책을 겸하였다. 이원조경주 부윤에 임명되지만 1850년 5월 암행어사 김세호가 정사를 소홀히 한다고 조정에 보고하여 파직을 당하게 된다.
배재홍, 『退溪學과 韓國文化』39, 경북대 퇴계학 연구소, 2006
鄭求福, 『古文書硏究』 9·10, 한국고문서학회, 1996
유지영, 『古文書硏究』 30, 한국고문서학회, 2007
『승정원일기』,
『응와 선생 문집』,
김인호

상세정보

1849년(헌종15) 4월, 국왕이 이원조겸 경주진 병마첨절제사에 임명한 4품 이상 고신
내용 및 특징
1849년(헌종 15) 4월에 국왕이 李源祚兼 慶州鎭 兵馬僉節制使에 임명한 4품 이상 고신[敎旨]이다. 이원조가 종3품 병마첨절제사의 관직이 내려졌기 때문에 교지가 발급된 것이다. 연호 아래에는 ‘施命之寶’를 찍는다.
이 고신이 발급된 일자는 도광 29년(헌종 15) 4월 이다.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이해 4월 21일에 이조판서 李若愚동부승지 金益文이 참석한 가운데 政事를 열어 이원조통정대부 수 경주 부윤에 임명하였는데 이때 겸직으로 경주진 병마첨절제사에 임명된 것으로 생각된다.
경상도에는 병마절도사 3인, 우후 2인이 있었으며 慶州鎭 · 安東鎭 · 東萊鎭 등 거진이 설치되어 있었다. 경주진 병마첨절제사는 종3품 무관직으로 경주진의 將이 되었으며 경주 부윤이 직책을 겸하였다. 경주 진관에는 蔚山 · 永川 · 興海 등에 동첨절제사淸河 · 延日 · 長鬐 · 彦陽 등에 절제도위가 속해 있었다.
이원조1809년 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 박사에 임명되지만 1816년 파직을 당한다. 하지만 1817년 敍用 되어 예·병조 좌랑, 제주 목사등 여러 벼슬을 역임하고 1846자산 도호부사에 임명되지만 1848년 5월 28일 병으로 임무를 수행하지 못해 파직을 당하게 된다. 이후 같은 해 7월 16일에 敍用 되어 그 이듬해 4월에 경주 부윤에 임명된다. 하지만 그는 1850년 5월 암행어사 金世鎬가 정사를 소홀히 한다고 조정에 狀啓하여 파직을 당하게 된다.
이원조(1792~1871)는 자가 周賢이며, 호는 凝窩이다. 초명은 李永祚이고, 1812년에 개명하였다. 생원 李亨鎭의 아들로 태어나 백부 李奎鎭의 양자가 되었다. 18세에 증광문과에 급제하였고, 제주목사, 한성판윤, 공조판서, 판의금부사 등을 역임하여, 조선후기 노론 집권기에 남인으로서는 드물게 1품의 반열에 올랐다. 학문적으로는 영남 주리론 계열의 대표적인 학자로서 鄭宗魯柳致明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의 성리학 사상은 조카 李震相에게 전해졌다.
배재홍, 『退溪學과 韓國文化』39, 경북대 퇴계학 연구소, 2006
鄭求福, 『古文書硏究』 9·10, 한국고문서학회, 1996
유지영, 『古文書硏究』 30, 한국고문서학회, 2007
『승정원일기』,
『응와 선생 문집』,
김인호

이미지

원문 텍스트

1849년 이원조(李源祚) 고신(告身)

敎旨
李源祚
兼慶州鎭
兵馬僉節
制使

道光二十九年四月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