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9년(헌종15) 4월 21일, 국왕이 이원조를 통정대부 수 경주 부윤에 임명한 4품 이상 고신
내용 및 특징
1849년(헌종 15) 4월 21일에 국왕이 李源祚를 通政大夫 守 慶州 府尹에 임명한 4품 이상 고신[敎旨]이다. 이원조가 정3품 통정대부의 품계가 내려졌기 때문에 교지가 발급된 것이다. 연호 아래에는 ‘施命之寶’를 찍는다.
이 고신이 발급된 일자는 도광 29년(헌종 15) 4월 21일이다.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이 일자에 이조판서 李若愚와 동부승지 金益文이 참석한 가운데 政事를 열어 이원조를 통정대부 수 경주 부윤에 임명하였다.
뒷면 좌측 하단에는 ‘吏吏安奎澈’이라고 적혀있다. ‘吏吏’는 ‘이조의 서리’라는 의미이고, ‘安奎澈’은 문서를 작성한 서리의 성명이다. 이와 같이 고신에는 뒷면 좌측하단에 문서 작성자가 기입되어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성주 이씨 이원조 가문이 소장하고 있는 고신의 뒷부분을 보면, 안규철뿐 아니라 ‘安宇成’, ‘安處得’, ‘安宙成’, ‘安至默’, ‘安鍾允’, ‘安允鼎’ 등 안씨 성을 가진 서리의 이름이 연속적으로 등장한다. 이는 이조에 근무하는 서리 가운데 안씨 성이 대를 이어 성주이씨 가문의 단골서리 역할을 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짐작된다.
통정대부는 정3품 上階이며 당상관이고, 경주 부윤는 종2품 외관직이다. 부윤은 관찰사와 동격으로 경주, 전주, 함흥, 평양, 의주에 파견하였다. 이들 가운데 전주, 함흥, 평양은 관찰사가 부윤을 겸임하였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부윤이 파견된 곳은 경주와 의주 밖에 없다. 또한 품계는 정3품이고 관직은 종2품이기 때문에 行守法에 의거하여 守을 기록한 것을 볼 수 있다.
이원조는 1809년 문과에 급제하고 이후 승문원 박사에 임명되지만 1816년 파직을 당한다. 하지만 1817년 敍用 되어 예·병조 좌랑, 제주 목사등 여러 벼슬을 역임하고 우부승지에 임명되지만 곧 遞職된다. 1846년 자산 도호부사에 임명되지만 1848년 5월 28일 병으로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자 파직을 당하게 되고 이후 같은 해 7월 16일에 敍用 되어 그 이듬해 4월에 경주 부윤에 임명되었다.
이원조(1792~1871)는 자가 周賢이며, 호는 凝窩이다. 초명은 李永祚이고, 1812년에 개명하였다. 생원 李亨鎭의 아들로 태어나 백부 李奎鎭의 양자가 되었다. 18세에 증광문과에 급제하였고, 제주목사, 한성판윤, 공조판서, 판의금부사 등을 역임하여, 조선후기 노론 집권기에 남인으로서는 드물게 1품의 반열에 올랐다. 학문적으로는 영남 주리론 계열의 대표적인 학자로서 鄭宗魯와 柳致明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의 성리학 사상은 조카 李震相에게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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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
『응와 선생 문집』,
김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