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6년(헌종12) 7월, 국왕이 이원조를 겸 성천진관 자산 병마동첨절제사 자모 중영장 관성장에 임명한 4품 이상 고신
내용 및 특징
1846년(헌종 12) 7월에 국왕이 李源祚를 兼 成川鎭管 慈山 兵馬同僉節制使 慈母 中營將 管城將에 임명한 4품 이상 고신[敎旨]이다. 이원조가 종3품 첨절제사의 관직이 내려졌기 때문에 교지가 발급된 것이다. 연호 아래에는 ‘施命之寶’를 찍는다.
이 고신이 발급된 일자는 도광 26년(헌종 12) 7월 이다.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7월 11일에 이조 판서 金興根와 이조참판 成遂默, 이조 참의 徐戴淳, 行 左承旨 徐念淳 등이 참석한 가운데 政事를 열어 이원조를 통정대부 행 자산 도호부사에 임명하였는데 이때 겸직으로 성천진관 자산 병마동첨절제사 자모중영장 관성장에 임명된 것으로 생각된다.
평안도에는 병마절도사 2인, 방어사 2인, 절제사 1인, 첨절제사 26인, 동첨절제사 20인을 두었다. 동첨절제사는 종4품 관직으로 成川鎭管은 德川, 价川, 慈山, 順川, 祥原에 설치되어 있었다. 또한 중영장은 각 도에 병영에 소속되어 所哨軍兵을 조련하고 유사시에는 출전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추는 역할로 전·후·좌·우·중 5영장 중 중영을 담당하였다. 관성장은 經理廳 소속의 정3품 관직으로 북한산성의 방어와 관리를 담당한 책임자였다.
이원조는 1809년 문과에 급제하고 이후 승문원 박사에 임명되지만 1816년 파직을 당한다. 하지만 1817년 敍用 되고 예·병조 좌랑, 제주 목사등 여러 벼슬을 거쳐우부승지에 임명되지만 곧 遞職된다. 그 다음해에 자산 도호부사에 임명되고 겸직으로 성천진관 자산병마동첨절제사 자모중영장관성장으로 임명되는데 이는 제주 목사를 지낸 경험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약 2년간 자산을 관리하였으나 1848년 5월 28일 병으로 임무를 수행하지 못해 파직된다.
이원조(1792~1871)는 자가 周賢이며, 호는 凝窩이다. 초명은 李永祚이고, 1812년에 개명하였다. 생원 李亨鎭의 아들로 태어나 백부 李奎鎭의 양자가 되었다. 18세에 증광문과에 급제하였고, 제주목사, 한성판윤, 공조판서, 판의금부사 등을 역임하여, 조선후기 노론 집권기에 남인으로서는 드물게 1품의 반열에 올랐다. 학문적으로는 영남 주리론 계열의 대표적인 학자로서 鄭宗魯와 柳致明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의 성리학 사상은 조카 李震相에게 전해졌다.
배재홍, 『退溪學과 韓國文化』39, 경북대 퇴계학 연구소, 2006
鄭求福, 『古文書硏究』 9·10, 한국고문서학회, 1996
유지영, 『古文書硏究』 30, 한국고문서학회, 2007
『승정원일기』,
『응와 선생 문집』,
김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