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4년(헌종10) 11월, 국왕이 이원조를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 참찬관 춘추관 수찬관에 임명한 4품 이상 고신
내용 및 특징
1844년(헌종 10) 11월에 국왕이 李源祚를 通政大夫 承政院 左承旨 兼 經筵 參贊官 春秋館 修撰官에 임명한 4품 이상 고신[敎旨]이다. 이원조가 정3품 통정대부의 품계가 내려졌기 때문에 교지가 발급된 것이다. 연호 아래에는 ‘施命之寶’를 찍는다.
이 고신이 발급된 일자는 도광 24년(헌종 10) 11월 5일이다.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이 일자에 병으로 좌승지직을 사임한 洪永圭를 대신해 이원조가 좌승지에 임명되었다.
통정대부는 정3품 上階 품계이고 당상관이며,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 참찬관 춘추관 수찬관는 정3품 당상관 직이다. 승정원 좌승지는 왕명의 출납을 담당했으며 특히 호조를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겸직인 경연 참찬관은 경연청의 정3품 관직으로 경연에 참여하여 국왕에게 경서 강론을 하였으며 정원은 7명 이었다. 춘추관 수찬관은 춘추관의 정3품 관직으로 時政을 기록하는 일을 담당하였으며 정원은 8명이다. 특히 그가 경연에 참석하게 된 것은 이원조의 학문적 역량을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이원조는 1809년 문과에 급제하고 이후 승문원 박사에 임명되지만 1816년 파직을 당한다. 하지만 1817년 敍用 되어 예·병조 좌랑, 제주 목사등 여러 관직을 겪었다. 이후 병으로 목사 직을 사직하고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다가 12월에 우부승지로 임명되었으며 그 다음해에 병으로 사직하게 되고 1844년 11월에 다시 좌승지로 임명된다.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그는 11월 5일에 승지에 임명되지만 그가 지방에 있었기 때문에 실질적인 업무는 11월 7일에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원조(1792~1871)는 자가 周賢이며, 호는 凝窩이다. 초명은 李永祚이고, 1812년에 개명하였다. 생원 李亨鎭의 아들로 태어나 백부 李奎鎭의 양자가 되었다. 18세에 증광문과에 급제하였고, 제주목사, 한성판윤, 공조판서, 판의금부사 등을 역임하여, 조선후기 노론 집권기에 남인으로서는 드물게 1품의 반열에 올랐다. 학문적으로는 영남 주리론 계열의 대표적인 학자로서 鄭宗魯와 柳致明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의 성리학 사상은 조카 李震相에게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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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求福, 『古文書硏究』 9·10, 한국고문서학회,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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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
『응와 선생 문집』,
김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