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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3년 이원조(李源祚) 고신(告身)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K05+KSM-XA.1843.1100-20130630.E47840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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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교령류-고신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정치/행정-임면-고신
작성주체 헌종, 이원조
작성지역 서울특별시
작성시기 1843
형태사항 크기: 52 X 76.5
장정: 낱장
수량: 1장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성주 한개 성산이씨 응와종택 /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안내정보

1843년 이원조(李源祚) 고신(告身)
1843년 10월, 헌종이원조절충장군 행 용양위 부호군에 임명하는 문서이다. 절충장군은 무신 정3품 당상관의 품계이고, 용양위 부호군은 오위의 종4품 관직이다. 또한 품계가 관직보다 높으므로 앞에 행(行)이라 적혀있다. 이원조1843년 윤7월에 형조 참의에 임명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낙향한다. 결국 조정에서는 다른 사람을 형조 참의에 임명하고 이원조의 생활을 보장하기 위해 절충장군 행 용양위 부호군에 임명한다.
배재홍, 『退溪學과 韓國文化』39, 경북대 퇴계학 연구소, 2006
鄭求福, 『古文書硏究』 9·10, 한국고문서학회, 1996
유지영, 『古文書硏究』 30, 한국고문서학회, 2007
『승정원일기』,
『응와 선생 문집』,
김인호

상세정보

1843년(헌종9) 10월, 국왕이 이원조절충장군 행 용양위 부호군에 임명한 4품 이상 고신
내용 및 특징
1843년(헌종 9) 10월에 국왕이 李源祚折衝將軍 行 龍驤衛 副護軍에 임명한 4품 이상 고신(敎旨)이다. 이원조가 정3품 절충장군의 품계가 내려졌기 때문에 교지가 발급된 것이다. 연호 아래에는 ‘施命之寶’를 찍는다.
이 고신이 발급된 일자는 도광 23년(헌종 9) 10월 이다.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10월 8일 병조참지 李元會동부승지 尹敎城이 참석한 가운데 政事를 열어 이원조부호군에 單付한 것을 볼 수 있다.
절충장군은 무신 정3품 당상관의 품계이고, 용양위 부호군은 五衛의 종4품 관직이다. 오위는 군무를 총괄하는 최고의 軍令기관으로 서울과 지방의 방위를 책임지고 있었으며 특히 용양위는 서울의 동부와 경상도 지역의 방위를 책임지고 있었다. 또한 부호군은 오위에 소속된 서반직 이었다. 하지만 직전법의 실시와 조선후기 오위의 기능이 유명무실화되면서 군직의 성격은 사라지고 양반층의 未官者나 한산자의 벼슬자리로 변한다. 즉 문·무관의 보직이 없는 자, 혹은 親功臣·功臣嫡長, 여러 잡직 등이 부호군에 임명된 것이다. 또한 품계가 정3품이고 관직이 종4품이기 때문에 行守法에 의거하여 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원조1809년 문과에 급제하고 이후 승문원 박사에 임명되지만 1816년 파직을 당한다. 하지만 1817년 敍用 되어 예·병조 좌랑, 제주 목사등 여러 관직을 거치게 된다. 이후 1843년 윤7월 17일에 형조 참의에 임명되지만 이원조형조 참의 직을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낙향한다. 결국 형조 참의 직이 遞職되고 조정에서는 절충장군 행 용양위 부호군의 벼슬을 내려 그의 기본적인 생활을 보장해 준 것으로 보인다.
이원조(1792~1871)는 자가 周賢이며, 호는 凝窩이다. 초명은 李永祚이고, 1812년에 개명하였다. 생원 李亨鎭의 아들로 태어나 백부 李奎鎭의 양자가 되었다. 18세에 증광문과에 급제하였고, 제주목사, 한성판윤, 공조판서, 판의금부사 등을 역임하여, 조선후기 노론 집권기에 남인으로서는 드물게 1품의 반열에 올랐다. 학문적으로는 영남 주리론 계열의 대표적인 학자로서 鄭宗魯柳致明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의 성리학 사상은 조카 李震相에게 전해졌다.
배재홍, 『退溪學과 韓國文化』39, 경북대 퇴계학 연구소, 2006
鄭求福, 『古文書硏究』 9·10, 한국고문서학회, 1996
유지영, 『古文書硏究』 30, 한국고문서학회, 2007
『승정원일기』,
『응와 선생 문집』,
김인호

이미지

원문 텍스트

1843년 이원조(李源祚) 고신(告身)

敎旨
李源祚
折衝將軍
行龍驤衛
副護軍

道光二十三年十月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