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1년(헌종7) 1월, 국왕이 이원조를 겸 제주진 병마수군절제사 전라도 수군방어사에 임명한 4품 이상 고신
내용 및 특징
1841년(헌종 7) 1월에 국왕이 李源祚를 兼 濟州鎭 兵馬水軍節制使 全羅道 水軍防禦使에 임명한 4품 이상 고신(敎旨)이다. 이원조에게 정2품 전라도 수군방어사와 정3품인 제주진 병마수군절제사가 내려졌기 때문에 교지가 발급된 것이다. 연호 아래에는 ‘施命之寶’를 찍는다.
이 고신이 발급된 일자는 도광 21년(헌종 7) 1월 이다.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이해 1월 1일에 政事를 열어 이원조를 제주 목사로 임명하였는데 이때 겸직으로 제주진 병마수군절제사 전라도 수군방어사에 임명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가 갑자기 임명된 이유는 1840년 표류하던 영국의 배가 대정 가파도에 이르러 소를 노략질하였기 때문이다.
제주도는 전라도에 소속된 특별한 진관으로 지정학적으로 중국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어 왜구의 침입을 효과적으로 막아야 되기 때문에 제주도에 巨鎭이 설치되었다. 제주 목사 또한 군사적인 기능 수행이 항상 강조되었다. 조선 초기 제주 목사는 만호·안무사의 직책을 겸하였으며 1466년부터는 병마수군절제사라 하였고 1638년에는 이를 고쳐 방어사라 했으며 1642년에는 절제사, 1713년에는 방어사란 직책을 겸임하게 된다. 이후 제주 목사는 전라도 수군방어사와 제주진 절제사를 겸임하게 되었다.
이원조는 1809년 문과에 급제하고 이후 승문원 박사에 임명되지만 1816년 파직을 당한다. 하지만 1817년 敍用 되고 여러 관직을 거쳐 1841년 제주 목사에 임명된다. 그는 28개월의 재임 기간 동안 백성을 안정시키고 군비를 확충하여 유사시를 대비하였다. 또한 제주의 문화적 분위기를 진작시켰으며 지방지인 『耽羅誌』를 저술하였다.
이원조(1792~1871)는 자가 周賢이며, 호는 凝窩이다. 초명은 李永祚이고, 1812년에 개명하였다. 생원 李亨鎭의 아들로 태어나 백부 李奎鎭의 양자가 되었다. 18세에 증광문과에 급제하였고, 제주목사, 한성판윤, 공조판서, 판의금부사 등을 역임하여, 조선후기 노론 집권기에 남인으로서는 드물게 1품의 반열에 올랐다. 학문적으로는 영남 주리론 계열의 대표적인 학자로서 鄭宗魯와 柳致明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의 성리학 사상은 조카 李震相에게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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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求福, 『古文書硏究』 9·10, 한국고문서학회,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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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
『응와 선생 문집』,
김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