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9년(헌종 5) 4월, 국왕이 이원조를 통훈대부 행 사헌부 장령에 임명한 4품 이상 고신
내용 및 특징
1839년(헌종 5) 4월에 국왕이 이원조를 통훈대부 행 사헌부 장령에 임명하는 4품 이상 고신[敎旨]이다. 발급일자 위에 ‘施命之寶’가 안보되어 있다.
사헌부는 조선시대 정치에 대한 언론 활동, 풍속의 교정, 백관에 대한 규찰과 탄핵, 서경 등을 관장하던 관청이다. 관원은 臺官이라고 하며, 사간원의 관원인 諫官과 병칭해 臺諫이라 하였다. 사헌부에 소속된 관원 가운데 掌令은 정4품직으로 정원은 2인이었다. 通訓大夫는 정3품 당하관에 해당하는 품계명칭이다. 수취자의 품계가 관직보다 높기 때문에 行守法에 따라 관직명 앞에 ‘行’자를 표기하였다.
발급일자는 도광 19년(헌종 5) 4월이다.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같은 해 4월 21일에 이조 판서 趙寅永, 이조 참판 金興根과 동부승지 李源庚이 참석한 가운데 정사를 열었고, 이원조가 掌令에 임명되었다.
뒷면 좌측 하단에는 ‘吏吏安至黙’이라고 적혀있다. ‘吏吏’는 ‘이조의 서리’라는 의미이고, ‘안지묵’은 문서를 작성한 서리의 성명이다. 이와 같이 고신에는 뒷면 좌측하단에 문서 작성자가 기입되어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성주 이씨 이원조 가문이 소장하고 있는 고신의 뒷부분을 보면, 안지묵뿐 아니라 ‘安奎澈’, ‘安宇成’, ‘安處得’, ‘安宙成’, ‘安鍾允’, ‘安允鼎’ 등 안씨 성을 가진 서리의 이름이 연속적으로 등장한다. 이는 이조에 근무하는 서리 가운데 안씨 성이 대를 이어 성주이씨 가문의 단골서리 역할을 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짐작된다.
이원조는 1809년(순조 9)에 문과에 급제하여 1818년(순조 18)까지 승문원 정자, 승문원 저작, 성균관 전적, 사헌부 감찰, 병조 좌랑 등을 역임하다가 낙향하였다. 낙향한 이후 사헌부 지평, 병조 정랑, 사간원 정언 등에 제수되었으나, 계속 지방에 머물면서 나아가지 않았다. 그리고 1826년(순조 26) 4월에 성균관 직강으로 다시 벼슬 생활을 시작하여, 다음 달인 5월에 결성 현감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그리고 1830년 (순조 30) 9월에 사간원 정언에 제수됨으로써 다시 중앙에서 벼슬을 하게 되었고, 10월에 성균관 전적에 임명되어 공무를 수행하였다. 그러나 다음해 다시 낙향하였고, 1833년(순조 33)에는 세자시강원 사서에 임명되었으나 지방에 있어서 체직되었다. 그리고 1837년(헌종 3)에 사간원 정언에 임명되었으나 계속 지방에 머물러 있었고, 이 고신과 같이 1839년(헌종 5)에 사헌부 장령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지방에 계속 머물러있다. 이원조가 통훈대부의 품계를 받은 것은 1818년(순조 18) 2월이다. 이원조가 당상관에 진입하는 것은 1841(헌종 7)년 제주 목사에 임명되면서부터이다.
이원조(1792~1871)는 자가 周賢이며, 호는 凝窩이다. 초명은 李永祚이고, 1812년에 개명하였다. 생원 李亨鎭의 아들로 태어나 백부 李奎鎭의 양자가 되었다. 18세에 증광문과에 급제하였고, 제주목사, 한성판윤, 공조판서, 판의금부사 등을 역임하여, 조선후기 노론 집권기에 남인으로서는 드물게 1품의 반열에 올랐다. 학문적으로는 영남 주리론 계열의 대표적인 학자로서 鄭宗魯와 柳致明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의 성리학 사상은 조카 李震相에게 전해졌다.
배재홍, 『退溪學과 韓國文化』39, 경북대 퇴계학 연구소, 2006
鄭求福, 『古文書硏究』 9·10, 한국고문서학회,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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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
『응와 선생 문집』,
명경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