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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0년 이원조(李源祚) 고신(告身)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K05+KSM-XA.1830.1100-20130630.E478400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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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교령류-고신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정치/행정-임면-고신
작성주체 순조, 이원조
작성지역 서울특별시
작성시기 1830
형태사항 크기: 52 X 75.5
장정: 낱장
수량: 1장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성주 한개 성산이씨 응와종택 /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안내정보

1830년 이원조(李源祚) 고신(告身)
1830년 9월 29일, 순조이원조통훈대부 행 사간원 정언에 임명하는 문서이다. 통훈대부는 정3품 품계이고, 사간원 정언은 정6품 관직이다. 또한 품계가 관직보다 높으므로 앞에 행(行)이라 적혀있다. 이원조결성 현감으로 있다가 1830사간원 정원에 임명되어 다시 중앙에서 벼슬을 하게 된다.
배재홍, 『退溪學과 韓國文化』39, 경북대 퇴계학 연구소, 2006
鄭求福, 『古文書硏究』 9·10, 한국고문서학회, 1996
유지영, 『古文書硏究』 30, 한국고문서학회, 2007
『승정원일기』,
『응와 선생 문집』,
김인호

상세정보

1830년(순조 30) 9월 29일, 국왕이 이원조통훈대부 행 사간원 정언에 임명한 4품 이상 고신
내용 및 특징
1830년(순조 30) 9월 29일에 국왕이 이원조통훈대부 행 사간원 정언에 임명하는 4품 이상 고신[敎旨]이다. 발급일자 위에 ‘施命之寶’가 안보되어 있다.
사간원은 조선시대에 간쟁 및 논박을 관장하던 관서이다. 언론 삼사의 하나로 諫院 또는 薇院이라고도 하였다. 관원은 諫官이라고 하며, 사헌부의 관원인 臺官과 병칭해 臺諫이라 하였다. 사간원에 소속된 관원 가운데 正言은 정6품직으로 정원은 2인이었다. 通訓大夫는 정3품 당하관에 해당하는 품계명칭이다. 수취자의 품계가 관직보다 높기 때문에 行守法에 따라 관직명 앞에 ‘行’자를 표기하였다.
발급일자는 도광 10년(순조 30) 9월 29이다.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이 일자에 이조 판서 徐能輔, 이조 참의 李寅泰좌부승지 趙秉龜가 참석한 가운데 政事를 열었고, 이원조正言에 임명되었다.
뒷면 좌측 하단에는 ‘吏吏安至黙’이라고 적혀있다. ‘吏吏’는 ‘이조의 서리’라는 의미이고, ‘안지묵’은 문서를 작성한 서리의 성명이다. 이와 같이 고신에는 뒷면 좌측하단에 문서 작성자가 기입되어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성주 이씨 이원조 가문이 소장하고 있는 고신의 뒷부분을 보면, 안지묵뿐 아니라 ‘安奎澈’, ‘安宇成’, ‘安處得’, ‘安宙成’, ‘安鍾允’, ‘安允鼎’ 등 안씨 성을 가진 서리의 이름이 연속적으로 등장한다. 이는 이조에 근무하는 서리 가운데 안씨 성이 대를 이어 성주이씨 가문의 단골서리 역할을 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짐작된다.
이원조1809년(순조 9)에 문과에 급제하여 1818년(순조 18)까지 승문원 정자, 승문원 저작, 성균관 전적, 사헌부 감찰, 병조 좌랑 등을 역임하다가 낙향하였다. 낙향한 이후 사헌부 지평, 병조 정랑, 사간원 정언 등에 제수되었으나, 계속 지방에 머물면서 나아가지 않았다. 그리고 1826년(순조 26) 4월에 성균관 직강으로 다시 벼슬 생활을 시작하여, 다음 달인 5월에 결성 현감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와 같이 1830(순조 30) 9월에 사간원 정언에 제수됨으로써 다시 중앙에서 벼슬을 하게 된 것이다. 사간원 정원 벼슬은 같은 해 10월 2일에 金魯敬의 사형을 주장하다가 다른 대간들과 함께 체직되었다. 이원조통훈대부의 품계를 받은 것은 1818년(순조 18) 2월이다. 이후 이원조가 당상관에 진입하는 것은 1841(헌종 7)년 제주 목사에 임명되면서부터이다.
이원조(1792~1871)는 자가 周賢이며, 호는 凝窩이다. 초명은 李永祚이고, 1812년에 개명하였다. 생원 李亨鎭의 아들로 태어나 백부 李奎鎭의 양자가 되었다. 18세에 증광문과에 급제하였고, 제주목사, 한성판윤, 공조판서, 판의금부사 등을 역임하여, 조선후기 노론 집권기에 남인으로서는 드물게 1품의 반열에 올랐다. 학문적으로는 영남 주리론 계열의 대표적인 학자로서 鄭宗魯柳致明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의 성리학 사상은 조카 李震相에게 전해졌다.
배재홍, 『退溪學과 韓國文化』39, 경북대 퇴계학 연구소, 2006
鄭求福, 『古文書硏究』 9·10, 한국고문서학회, 1996
유지영, 『古文書硏究』 30, 한국고문서학회, 2007
『승정원일기』,
『응와 선생 문집』,
명경일

이미지

원문 텍스트

1830년 이원조(李源祚) 고신(告身)

敎旨
李源祚通訓
大夫行司諫院
正言

道光十年九月二十九日
吏吏安至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