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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6년 이원조(李源祚) 고신(告身)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K05+KSM-XA.1826.1100-20130630.E478400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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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교령류-고신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정치/행정-임면-고신
작성주체 순조, 이원조
작성지역 서울특별시
작성시기 1826
형태사항 크기: 51 X 75
장정: 낱장
수량: 1장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성주 한개 성산이씨 응와종택 /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안내정보

1826년 이원조(李源祚) 고신(告身)
1826년 5월, 순조이원조홍주진관 결성 병마절제도위에 임명하는 문서이다. 이원조1826년 5월 24일에 結城 縣監에 임명됨에 따라 겸직으로 병마절제도위에 임명된 것이다. 병마절제도위는 무관 종6품 관직이며 결성은 홍주진관에 소속된 것으로 결성 병마절제도위가 관리 하였다.
배재홍, 『退溪學과 韓國文化』39, 경북대 퇴계학 연구소, 2006
鄭求福, 『古文書硏究』 9·10, 한국고문서학회, 1996
유지영, 『古文書硏究』 30, 한국고문서학회, 2007
『승정원일기』,
『응와 선생 문집』,
김인호

상세정보

1826년(순조 26) 5월, 국왕이 이원조홍주진관 결성 병마절제도위에 임명한 4품 이상 고신
내용 및 특징
1826년(순조 26) 5월에 국왕이 이원조洪州鎭管 結城 兵馬節制都尉에 임명하는 4품 이상 告身[敎旨]이다. 발급일자 위에 ‘施命之寶’가 안보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모든 지방 수령에게 육군의 지휘관 격인 병마직을 겸하게 하였다. 이원조1826년(순조 26) 5월 24일에 結城 縣監에 제수되었고, 이에 따라 병마직인 병자절제도위를 겸직하게 된 것이다.
조선시대 각 도에는 병마절도사가 主鎭에 있으면서 도내 각 진관의 육군·수군에 대한 군사 지휘권을 행사하였다. 또 아래 巨鎭에는 부윤·목사·부사병마절제사·첨절제사 등을 겸하면서 군사 조직을 장악하였다. 그리고 말단의 鎭은 군수·현령·현감 등이 병마동첨절제사·절제도위 등을 겸했고, 특수 지역에는 만호를 따로 두었다.
충청도는 2인의 병마절도사가 있었는데, 1인은 관찰사가 겸하고 1인은 전담 무장을 임명하였다. 이 당시 충청도에는 忠州鎭, 淸州鎭, 洪州鎭에 거진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 곳 수령인 목사는 각 진관의 첨절제사를 겸임하였다. 홍주 진관에 소속된 고을 가운데 舒川, 瑞山, 泰安, 沔川, 溫陽, 大興의 수령은 병마동첨절제사를 겸임하였고, 結城, 平澤, 鴻山, 靑陽, 庇仁, 藍浦, 保寧, 牙山, 新昌, 禮山, 海美, 唐津의 수령은 병마절제도위를 겸임하여 속해 있었다.
뒷면 좌측 하단에는 ‘吏吏安至黙’이라고 적혀있다. ‘吏吏’는 ‘이조의 서리’라는 의미이고, ‘안지묵’은 문서를 작성한 서리의 성명이다. 이와 같이 고신에는 뒷면 좌측하단에 문서 작성자가 기입되어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성주 이씨 이원조 가문이 소장하고 있는 고신의 뒷부분을 보면, 안지묵뿐 아니라 ‘安奎澈’, ‘安宇成’, ‘安處得’, ‘安宙成’, ‘安鍾允’, ‘安允鼎’ 등 안씨 성을 가진 서리의 이름이 연속적으로 등장한다. 이는 이조에 근무하는 서리 가운데 안씨 성이 대를 이어 성주이씨 가문의 단골서리 역할을 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짐작된다.
이원조1809년(순조 9)에 문과에 급제하여 1818년(순조 18)까지 승문원 정자, 승문원 저작, 성균관 전적, 사헌부 감찰, 병조 좌랑 등을 역임하다가 낙향하였다. 정3품 당하 통훈대부의 품계를 받은 것은 1818년(순조 18) 2월이다. 낙향한 이후 사헌부 지평, 병조 정랑, 사간원 정언 등에 제수되었으나, 계속 지방에 머물면서 나아가지 않았다. 그리고 이 고신과 같이 1826년(순조 26) 4월 10일에 성균관 직강으로 제수되자, 상경하여 벼슬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다음 달인 5월에 다시 결성 현감에 제수되어 지방 수령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이원조(1792~1871)는 자가 周賢이며, 호는 凝窩이다. 초명은 李永祚이고, 1812년에 개명하였다. 생원 李亨鎭의 아들로 태어나 백부 李奎鎭의 양자가 되었다. 18세에 증광문과에 급제하였고, 제주목사, 한성판윤, 공조판서, 판의금부사 등을 역임하여, 조선후기 노론 집권기에 남인으로서는 드물게 1품의 반열에 올랐다. 학문적으로는 영남 주리론 계열의 대표적인 학자로서 鄭宗魯柳致明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의 성리학 사상은 조카 李震相에게 전해졌다.
배재홍, 『退溪學과 韓國文化』39, 경북대 퇴계학 연구소, 2006
鄭求福, 『古文書硏究』 9·10, 한국고문서학회, 1996
유지영, 『古文書硏究』 30, 한국고문서학회, 2007
『승정원일기』,
『응와 선생 문집』,
명경일

이미지

원문 텍스트

1826년 이원조(李源祚) 고신(告身)

敎旨
李源祚
洪州鎭管結
城兵馬節制
都尉

道光六年五月日
吏吏安至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