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6년(순조 26) 4월 10일, 국왕이 이원조를 통훈대부 행 성균관 직강에 임명한 4품 이상 고신
내용 및 특징
1826년(순조 26) 4월 10일에 국왕이 이원조를 通訓大夫 行 成均館 直講에 임명하는 4품 이상 告身[敎旨]이다. 발급일자 위에 ‘施命之寶’가 안보되어 있다.
통훈대부는 문관 정3품 당하에 해당하는 품계 명칭이다. 성균관은 조선시대에 인재양성을 위하여 서울에 설치한 국립대학격의 유학교육기관으로, 太學·泮宮·賢關·芹宮이라고도 하였다. 성균관에 소속된 관원은 모두 문관만 임용하였으며, 이 가운데 직강은 정5품직으로 정원은 4員이었다. 수취자의 품계가 관직의 품계보다 높기 때문에 行守法에 따라 품계명과 관직명 사이에 ‘行’자를 표기하였다.
고신의 발급일자는 도광 6년(순조 26) 4월 10일이다.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이 일자에 이조 판서 趙萬永과 좌승지 金炳朝가 참석한 가운데 政事를 열어, 이원조를 직강으로 삼을 것을 결정하였다.
뒷면 좌측 하단에는 ‘吏吏安’이라고 적혀있다. ‘吏吏’는 ‘이조의 서리’라는 의미이고, ‘안’은 문서를 작성한 서리의 성명이다. 이름은 문서가 훼손되어 알아볼 수 없다. 이와 같이 고신에는 뒷면 좌측하단에 문서 작성자가 기입되어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성주 이씨 이원조 가문이 소장하고 있는 고신의 뒷부분을 보면, ‘安宙成’, ‘安宇成’, ‘安處得’, ‘安至默’, ‘安奎澈’, ‘安允鼎’, ‘安鍾允’ 등 안씨 성을 가진 서리의 이름이 연속적으로 등장한다. 이는 이조에 근무하는 서리 가운데 안씨 성이 대를 이어 성주이씨 가문의 단골서리 역할을 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짐작된다.
이원조는 1809년(순조 9)에 문과에 급제하여 1818년(순조 18)까지 승문원 정자, 승문원 저작, 성균관 전적, 사헌부 감찰, 병조 좌랑 등을 역임하다가 낙향하였다. 정3품 당하 통훈대부의 품계를 받은 것은 1818년(순조 18) 2월이다. 낙향한 이후 사헌부 지평, 병조 정랑, 사간원 정언 등에 제수되었으나, 계속 지방에 머물면서 나아가지 않았다. 그리고 이 고신과 같이 1826년(순조 26) 4월 10일에 성균관 직강으로 제수되자, 다시 상경하여 벼슬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원조(1792~1871)는 자가 周賢이며, 호는 凝窩이다. 초명은 李永祚이고, 1812년에 개명하였다. 생원 李亨鎭의 아들로 태어나 백부 李奎鎭의 양자가 되었다. 18세에 증광문과에 급제하였고, 제주목사, 한성판윤, 공조판서, 판의금부사 등을 역임하여, 조선후기 노론 집권기에 남인으로서는 드물게 1품의 반열에 올랐다. 학문적으로는 영남 주리론 계열의 대표적인 학자로서 鄭宗魯와 柳致明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의 성리학 사상은 조카 李震相에게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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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求福, 『古文書硏究』 9·10, 한국고문서학회,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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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
『응와 선생 문집』,
명경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