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6년(순조 26) 5월 24일, 국왕이 이원조를 통훈대부 행 결성 현감에 임명한 4품 이상 고신
내용 및 특징
1826년(순조 26) 5월 24일에 국왕이 이원조를 通訓大夫 行 結城縣監에 임명하는 4품 이상 告身[敎旨]이다. 발급일자 위에 ‘施命之寶’가 안보되어 있다.
통훈대부는 문관 정3품 당하에 해당하는 품계 명칭이다. 현감은 조선시대 최하위의 지방행정구역 단위였던 현의 수령으로, 종6품직이다. 수취자의 품계가 관직의 품계보다 높기 때문에 行守法에 따라 품계명과 관직명 사이에 ‘行’자를 표기하였다.
고신의 발급일자는 도광 6년(순조 26) 5월 24일이다. 『일성록』에 의하면, 같은 해 5월 8일에 충청도 관찰사가 결성 현감 曹錫駿가 암행어사로부터 봉고파직 되었음을 보고하였고, 그 후임으로 이원조가 임명되었다.
이원조는 1809년(순조 9)에 문과에 급제하여 1818년(순조 18)까지 승문원 정자, 승문원 저작, 성균관 전적, 사헌부 감찰, 병조 좌랑 등을 역임하다가 낙향하였다. 정3품 당하 통훈대부의 품계를 받은 것은 1818년(순조 18) 2월이다. 낙향한 이후 사헌부 지평, 병조 정랑, 사간원 정언 등에 제수되었으나, 계속 지방에 머물면서 나아가지 않았다. 그리고 이 고신과 같이 1826년(순조 26) 4월 10일에 성균관 직강으로 제수되자, 상경하여 벼슬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다음 달인 5월에 다시 결성 현감에 제수되어 지방 수령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이원조(1792~1871)는 자가 周賢이며, 호는 凝窩이다. 초명은 李永祚이고, 1812년에 개명하였다. 생원 李亨鎭의 아들로 태어나 백부 李奎鎭의 양자가 되었다. 18세에 증광문과에 급제하였고, 제주목사, 한성판윤, 공조판서, 판의금부사 등을 역임하여, 조선후기 노론 집권기에 남인으로서는 드물게 1품의 반열에 올랐다. 학문적으로는 영남 주리론 계열의 대표적인 학자로서 鄭宗魯와 柳致明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의 성리학 사상은 조카 李震相에게 전해졌다.
배재홍, 『退溪學과 韓國文化』39, 경북대 퇴계학 연구소, 2006
鄭求福, 『古文書硏究』 9·10, 한국고문서학회, 1996
유지영, 『古文書硏究』 30, 한국고문서학회, 2007
『일성록』,
『응와 선생 문집』,
명경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