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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9년 이규진(李奎鎭) 고신(告身)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K05+KSM-XA.1819.1100-20130630.E4784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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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교령류-고신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정치/행정-임면-고신
작성주체 순조, 이규진
작성지역 서울특별시
작성시기 1819
형태사항 크기: 52 X 74
장정: 낱장
수량: 1장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성주 한개 성산이씨 응와종택 /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안내정보

1819년 이규진(李奎鎭) 고신(告身)
1819년(순조 19) 9월 24일, 국왕이 이규진통훈대부 행 은율현감 겸 춘추관 기사관으로 임명하는 4품 이상 고신(敎旨)이다. 이규진1799년 문과에서 장원급제 한 뒤 관직생활을 시작한다. 그러나 1804강원도 도사라는 외관직을 임명받고서 사직서를 제출한 이후에는 관직 생활을 하지 않고 고향인 성주에 머무르는 것으로 보인다. 1811년에는 병조 정랑을 제수 받지만 병으로 인한 사직서를 제출하고 계속해서 재외에 머무른다. 1813년 5월 이후에는 수차례 사헌부 장령을 임명받게 된다. 그러나 계속해서 고향인 성주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819년 9월 10일에 은율 현감과 함께 해주 진관 병마절제도위를 제수 받고 곧이어 9월 24일에는 춘추관 기사관도 겸직을 임명받았으나 역시 부임하지 않고 경상도 성주에 있다는 기록이 『승정원일기』에 보인다.
배재홍, 『退溪學과 韓國文化』39, 경북대 퇴계학 연구소, 2006
鄭求福, 『古文書硏究』 9·10, 한국고문서학회, 1996
유지영, 『古文書硏究』 30, 한국고문서학회, 2007
『승정원일기』,
『응와 선생 문집』,
서은주

상세정보

1819년 9월 24일, 국왕이 이규진통훈대부 행 은율현감 겸 춘추관 기사관으로 임명하는 4품 이상 고신[敎旨]
내용 및 특징
1819년(순조 19) 9월 24일에 국왕이 이규진통훈대부 행 은율현감 겸 춘추관 기사관으로 임명하는 4품 이상 고신[敎旨]이다. 발급일자 위에 어보인 ‘施命之寶’가 답인되어 있다.
은율황해도에 있는 지역이다. 현감은 종6품 외관직으로 122員이 정원이었다. 춘추관은 時政의 기록을 관장한 관서이다. 기사관은 時政記를 기록하는 史官으로 역사의 기록 ‧ 편찬을 담당하였다. 품계는 정6품~정9품으로 모두 문관으로 임용하되, 다른 관부의 관원이 겸하도록 되어 있었다. 또한 간혹 諸道의 도사 및 문관 수령이 기사관을 겸하도록 한 적도 있었다.
국왕이 명령을 내린 일자는 가경 24년(순조 19) 9월 24일이다.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이 일자에 이조판서 李存秀우부승지 李光文이 참석한 가운데 政事를 열어 이규진은율 현감 겸 춘추관 기사관에 單付하기로 결정하였다.
이규진은 36세인 1799년(정조 23) 9월 문과에서 장원급제 한 뒤 성균관 전적(정6품), 병조 좌랑(정6품), 사헌부 감찰(정6품)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품계도 약 5년 만에 승의랑(정6품), 조봉대부(종4품)를 거쳐 당하관의 최상인 통훈대부(정3품)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1804년(순조 4) 2월 13일에 강원도 도사(종5품)라는 외관직을 임명받고서 아버지의 병환으로 인해 부임지로 떠나기 어렵다는 이유로 사직서를 제출한 이후엔 正史기록에 그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계속 고향인 성주에 머무르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7년 뒤인 1811년(순조 11) 3월 17일에 종부시 주부(종6품)의 임명을 받고 한 달 뒤인 윤3월에는 久任官인 병조 정랑(정5품)을 제수 받는다. 그러나 이규진은 5개월 뒤인 8월 11일에 병으로 인한 사직서를 제출해서 임금의 허락을 받게 된다. 이후 사헌부 감찰(정6품), 사직서 령(종5품), 사헌부 지평(정5품)에 임명되었으며 1813년(순조 13) 5월 10일에는 사헌부 장령(정4품)으로 임명받게 된다. 그러나 이규진은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계속해서 고향인 성주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5년 동안 사헌부 지평(정5품)을 비롯해서 수차례 계속해서 사헌부 장령으로 삼는다는 명령을 받았지만 재외에 머무르며 상경하지 않는다. 또한 2년 뒤인 1819년(순조 19) 9월 10일에 은율 현감(종6품)과 함께 해주 진관 병마절제도위(종6품)를 제수 받고 곧이어 9월 24일에는 춘추관 기사관도 겸직을 임명받았으나 역시 부임하지 않고 경상도 성주에 있다는 기록이 『승정원일기』에 보인다. 이때 이규진의 나이 56세이다.
이규진(1763~1822)은 本貫은 星山이다. 字는 而拱이며 號는 農棲이다. 父는 李敏謙이고 祖父는 李碩文이다. 거주지는 星州이며. 鄭宗魯의 문인이다. 1783년 式年試 3등으로 생원에 합격하여 1799년 謁聖試 장원으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왕으로부터 朱子書百選을 상으로 받았다. 左贊成에 증직된다. 유고가 전한다.
배재홍, 『退溪學과 韓國文化』39, 경북대 퇴계학 연구소, 2006
鄭求福, 『古文書硏究』 9·10, 한국고문서학회, 1996
유지영, 『古文書硏究』 30, 한국고문서학회, 2007
『승정원일기』,
『응와 선생 문집』,
서은주

이미지

원문 텍스트

1819년 이규진(李奎鎭) 고신(告身)

敎旨
李奎鎭通訓
大夫行殷栗縣
監兼春秋館記
事官

嘉慶二十四年九月二十四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