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9년 9월, 국왕이 이규진을 겸 해주 진관 은율 병마절제도위로 임명하는 4품 이상 고신[敎旨]
내용 및 특징
1819년(순조 19) 9월에 국왕이 이규진을 겸 해주 진관 은율 병마절제도위로 임명하는 4품 이상 고신[敎旨]이다. 발급일자 위에 어보인 ‘施命之寶’가 답인되어 있다.
은율은 황해도에 있는 지역이다. 병마절제도위는 종6품으로 서반 무반 외관직이다. 각 도 절도사 관할 하의 諸鎭에 두었으며 현령(종5품), 현감(종6품) 및 巨邑의 판관(종5품)이 겸직하였다. 巨鎭을 중심으로 지방 군사조직의 말단인 병사들을 통솔하였다.
국왕이 명령을 내린 일자는 가경 24년(순조 19) 9월 10일인 것으로 보인다.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이 일자에 이조판서 李存秀와 도승지 李龍秀가 참석한 가운데 政事를 열어 이규진을 은율 현감으로 삼기로 결정하였다. 이때 이규진을 은율 현감으로 삼으면서 황해도 해주 진관 병마절제도위도 함께 제수하는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모든 지방 수령에게 병마직을 겸하게 하였다. 조선은 1457년(세조 3) 진관체제를 정립하였는데 진관체제는 병마절도사나 수군절도사의 主鎭 아래에 몇 개의 巨鎭을 두고 거진의 첨절제사가 여러 진을 통할하도록 이루어졌다. 각 도에는 병마절도사가 주진에 있으면서 도내 각 진관의 육군에 대한 군사 지휘권을 행사하였다. 또 아래 거진에는 부윤 ․ 목사 ․ 부사가 절제사 ․ 첨절제사 등을 겸하면서 군사조직을 장악하였다. 그리고 말단의 진은 군수 ․ 현령 ․ 현감 등이 동첨절제사 ․ 절제도위 등을 겸했고, 특수지역에는 만호를 두었다. 이 당시 황해도에서 주진은 해주였으며, 黃州 海州 所江에 거진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 아래 은율을 포함하여 28 지역에 諸鎭이 설치되어 있었다.
뒷면 좌측 하단에는 ‘吏吏安至黙’이라고 적혀있다. ‘吏吏’는 ‘이조의 서리’라는 의미이고, ‘안지묵’은 문서를 작성한 서리의 성명이다. 이와 같이 고신에는 뒷면 좌측하단에 문서 작성자가 기입되어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성주 이씨 이원조 가문이 소장하고 있는 고신의 뒷부분을 보면, 안지묵뿐 아니라 ‘安奎澈’, ‘安宇成’, ‘安處得’, ‘安宙成’, ‘安鍾允’, ‘安允鼎’ 등 안씨 성을 가진 서리의 이름이 연속적으로 등장한다. 이는 이조에 근무하는 서리 가운데 안씨 성이 대를 이어 성주이씨 가문의 단골서리 역할을 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짐작된다.
이규진은 36세인 1799년(정조 23) 9월 문과에서 장원급제 한 뒤 성균관 전적(정6품), 병조 좌랑(정6품), 사헌부 감찰(정6품)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품계도 약 5년 만에 승의랑(정6품), 조봉대부(종4품)를 거쳐 당하관의 최상인 통훈대부(정3품)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1804년(순조 4) 2월 13일에 강원도 도사(종5품)라는 지방관직을 임명받고서 아버지의 병환으로 인해 부임지로 떠나기 어렵다는 이유로 사직서를 제출한 이후엔 正史기록에 그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계속 고향인 성주에 머무르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7년 뒤인 1811년(순조 11) 3월 17일에 종부시 주부(종6품)의 임명을 받고 한 달 뒤인 윤3월에는 久任官인 병조 정랑(정5품)을 제수 받는다. 그러나 이규진은 5개월 뒤인 8월 11일에 병으로 인한 사직서를 제출해서 임금의 허락을 받게 된다. 이후 사헌부 감찰(정6품), 사직서 령(종5품), 사헌부 지평(정5품)에 임명되었으며 1813년(순조 13) 5월 10일에는 사헌부 장령(정4품)으로 임명받게 된다. 그러나 이규진은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계속해서 고향인 성주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5년 동안 사헌부 지평(정5품)을 비롯해서 수차례 계속해서 사헌부 장령으로 삼는다는 명령을 받았지만 재외에 머무르며 상경하지 않는다. 또한 2년 뒤인 1819년(순조 19) 9월 10일에는 은율 현감(종6품)과 함께 겸 해주 진관 은율 병마절제도위(종6품)를 제수 받았으나 역시 부임하지 않고 경상도 성주에 있다는 기록이 『승정원일기』에 보인다. 이때 이규진의 나이 56세이다.
이규진(1763~1822)은 本貫은 星山이다. 字는 而拱이며 號는 農棲이다. 父는 李敏謙이고 祖父는 李碩文이다. 거주지는 星州이며. 鄭宗魯의 문인이다. 1783년 式年試 3등으로 생원에 합격하여 1799년 謁聖試 장원으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왕으로부터 朱子書百選을 상으로 받았다. 左贊成에 증직된다. 유고가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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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求福, 『古文書硏究』 9·10, 한국고문서학회,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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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
『응와 선생 문집』,
서은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