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8년(순조18) 1월 28일, 국왕이 이원조를 조봉대부 행 성균관 전적에 임명한 4품 이상 고신
내용 및 특징
1818년(순조 18) 1월 28일에 국왕이 李源祚를 朝奉大夫 行 成均館 典籍에 임명한 4품 이상 고신[敎旨]이다. 이원조에게 종4품 조봉대부의 품계가 내려졌기 때문에 교지가 발급된 것이다. 연호 아래에는 ‘施命之寶’를 찍는다.
이 고신이 발급된 일자는 가경 23년(순조 18) 1월 28일이다.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이 일자에 이조참판 洪羲臣와 우승지 朴蓍壽가 참석한 가운데 政事를 열어 이원조를 전적에 임명하였다.
뒷면 좌측 하단에는 ‘吏吏安至黙’이라고 적혀있다. ‘吏吏’는 ‘이조의 서리’라는 의미이고, ‘안지묵’은 문서를 작성한 서리의 성명이다. 이와 같이 고신에는 뒷면 좌측하단에 문서 작성자가 기입되어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성주 이씨 이원조 가문이 소장하고 있는 고신의 뒷부분을 보면, 안지묵뿐 아니라 ‘安奎澈’, ‘安宇成’, ‘安處得’, ‘安宙成’, ‘安鍾允’, ‘安允鼎’ 등 안씨 성을 가진 서리의 이름이 연속적으로 등장한다. 이는 이조에 근무하는 서리 가운데 안씨 성이 대를 이어 성주이씨 가문의 단골서리 역할을 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짐작된다.
조봉대부는 종4품 下階이며 東班 文官에게 주던 품계이고, 성균관 전적은 정6품 관직이다. 또한 고신에서 그가 받은 품계는 종4품계이나 관직은 정6품직이기에 行守法에 의거하여 行을 기록한 것을 볼 수 있다. 성균관은 성현을 봉사하며 고급관리를 양성하기 위한 교학기관이었다. 성균관에 소속된 관직 가운데 전적은 圖籍의 收藏과 출납·관리의 일을 맡았으며 모두 문과 출신으로 정원은 13명이다.
이원조는 1809년 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 부정자를 거쳐 승문원 박사에 임명되었다. 그 후 1816년 12월 17일 휴가의 기한이 지났는데도 서울로 올라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파직을 당하였다. 하지만 1817년 3월 23일에 敍用이 되고 1818년 1월 25일에는 종6품 부사과에 單付되었다. 이후 1818 1월 28일 政事를 통해 그는 조봉대부 행 성균관전적에 임명되었다. 즉 이원조는 파직당한 뒤 약 2년 후에 다시 관직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이원조(1792~1871)는 자가 周賢이며, 호는 凝窩이다. 초명은 李永祚이고, 1812년에 개명하였다. 생원 李亨鎭의 아들로 태어나 백부 李奎鎭의 양자가 되었다. 18세에 증광문과에 급제하였고, 제주목사, 한성판윤, 공조판서, 판의금부사 등을 역임하여, 조선후기 노론 집권기에 남인으로서는 드물게 1품의 반열에 올랐다. 학문적으로는 영남 주리론 계열의 대표적인 학자로서 鄭宗魯와 柳致明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의 성리학 사상은 조카 李震相에게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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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
『응와 선생 문집』,
김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