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8년(순조 18) 3월 18일, 국왕이 이원조를 통훈대부 행 예조 정랑에 임명한 4품 이상 고신
내용 및 특징
1818년(순조 18) 3월 18일에 국왕이 李源祚를 通訓大夫 行 禮曹 正郞에 임명한 4품 이상 고신[敎旨]이다. 이원조에게 정3품 통훈대부의 품계가 내려졌기 때문에 이 형식의 교지가 발급된 것이다. 연호 아래에는 ‘施命之寶’를 찍는다.
이 고신이 발급된 일자는 가경 23년(순조 18) 3월 18일이다.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이 일자에 兼判書 沈象奎와 도승지 宋知濂가 참석한 가운데 政事를 열어 이원조를 예조 정랑에 임명하였다.
뒷면 좌측 하단에는 ‘吏吏安宙成’이라고 적혀있다. ‘吏吏’는 ‘이조의 서리’라는 의미이고, ‘안주성’은 문서를 작성한 서리의 성명이다. 이와 같이 고신에는 뒷면 좌측하단에 문서 작성자가 기입되어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성주 이씨 이원조 가문이 소장하고 있는 고신의 뒷부분을 보면, 안주성뿐 아니라 ‘安奎澈’, ‘安宇成’, ‘安處得’, ‘安至默’, ‘安鍾允’, ‘安允鼎’ 등 안씨 성을 가진 서리의 이름이 연속적으로 등장한다. 이는 이조에 근무하는 서리 가운데 안씨 성이 대를 이어 성주이씨 가문의 단골서리 역할을 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짐작된다.
통훈대부는 정3품 文官에게 주던 품계이고, 예조 정랑은 정5품 관직이다. 또한 그가 받은 품계는 정3품계이나 관직은 정5품직이기 때문에 行守法에 의거하여 行을 기록한 것을 볼 수 있다. 예조는 예악·제사·연향·조빙·학교·과거 등을 관장하던 관서로 육조의 하나이다. 南宮·春官 또는 儀曹라고도 한다. 예조에 소속된 정랑은 예조의 중견실무 책임자들로 정원은 3명이었다. 또한 정랑은 대표적인 청요직으로 문과 출신의 문관들이 임명되었다. 하지만 영·정조대에 堂下 청요직에 대한 通淸權을 폐지함으로써 정랑 19세기 정치적 기능이 축소되었다.
이원조는 1809년 문과에 급제하고 이후 승문원 박사에 임명되었으나 곧 파직되고 2년 뒤에 성균관 전적에 임명된다. 이후 1818년 2월 5일에 정6품 사헌부 감찰에 임명되고 그 해 3월 18일에 정5품 예조 전랑으로 陞職된다.
이원조(1792~1871)는 자가 周賢이며, 호는 凝窩이다. 초명은 李永祚이고, 1812년에 개명하였다. 생원 李亨鎭의 아들로 태어나 백부 李奎鎭의 양자가 되었다. 18세에 증광문과에 급제하였고, 제주목사, 한성판윤, 공조판서, 판의금부사 등을 역임하여, 조선후기 노론 집권기에 남인으로서는 드물게 1품의 반열에 올랐다. 학문적으로는 영남 주리론 계열의 대표적인 학자로서 鄭宗魯와 柳致明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의 성리학 사상은 조카 李震相에게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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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
『응와 선생 문집』,
김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