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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8년 이원조(李源祚) 고신(告身)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K05+KSM-XA.1818.1100-20130630.E47840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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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교령류-고신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정치/행정-임면-고신
작성주체 순조, 이원조
작성지역 서울특별시
작성시기 1818
형태사항 크기: 56.5 X 80.5
장정: 낱장
수량: 1장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성주 한개 성산이씨 응와종택 /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안내정보

1818년 이원조(李源祚) 고신(告身)
1818년(순조 18) 6월 25일, 국왕이 이원조통훈대부 행 병조 좌랑로 임명하는 4품 이상 고신(교지)이다. 『승정원일기』를 살펴보면 구임관인 병조 좌랑직을 제수 받아 1년 정도 수행하던 이원조는 다음해(1819년 6월)에 체직을 요청하고 있다. 병조에서 임금에게 아뢴 것을 보면, 이원조가 몸의 병이 위독해져 여러번 체직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병조 좌랑의 직은 매우 중요하여 오래 비어둘 수 없으니 바꿔 달라고 청해 임금의 허락을 받게 된다. 이후 고향인 성주로 돌아간 것 같다.
배재홍, 『退溪學과 韓國文化』39, 경북대 퇴계학 연구소, 2006
鄭求福, 『古文書硏究』 9·10, 한국고문서학회, 1996
유지영, 『古文書硏究』 30, 한국고문서학회, 2007
『승정원일기』,
『응와 선생 문집』,
서은주

상세정보

1818년 6월 25일, 국왕이 이원조통훈대부 행 병조 좌랑로 임명하는 4품 이상 고신[敎旨]
내용 및 특징
1818년(순조 18) 6월 25일에 국왕이 이원조통훈대부 행 병조 좌랑로 임명하는 4품 이상 고신[敎旨]이다. 발급일자 위에 어보인 ‘施命之寶’가 답인되어 있다.
병조는 조선시대 군사관계 업무를 총괄하던 중추적 기관이다. 6조의 하나로 夏官 · 西銓이라고도 한다. 이조와 아울러 銓曹 또는 兩銓으로 일컬어진다. 병조에 소속된 관직 가운데 佐郞은 정6품으로 4員이 정원이었다. 병조 정랑을 지낸 사람은 병조 좌랑을 제수 받을 수 없었다. 通訓大夫는 문관 정3품 하계에 해당하는 품계 명칭으로 당하관의 최상이다. 품계와 관직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行守法에 따라 관직이 품계보다 낮은 경우인 ‘行’을 품계와 관직 사이에 썼다.
국왕이 명령을 내린 일자는 가경 23년(순조 18) 6월 25일이다.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이 일자에 이조판서 沈象奎동부승지 洪冕燮이 참석한 가운데 都目政事를 열어, 이원조병조 좌랑에 삼기로 결정하였다.
뒷면 좌측 하단에는 ‘吏吏安至黙’이라고 적혀있다. ‘吏吏’는 ‘이조의 서리’라는 의미이고, ‘안지묵’은 문서를 작성한 서리의 성명이다. 이와 같이 고신에는 뒷면 좌측하단에 문서 작성자가 기입되어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성주 이씨 이원조 가문이 소장하고 있는 고신의 뒷부분을 보면, 안지묵뿐 아니라 ‘安奎澈’, ‘安宇成’, ‘安處得’, ‘安宙成’, ‘安鍾允’, ‘安允鼎’ 등 안씨 성을 가진 서리의 이름이 연속적으로 등장한다. 이는 이조에 근무하는 서리 가운데 안씨 성이 대를 이어 성주이씨 가문의 단골서리 역할을 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짐작된다.
이원조는 문과급제 후 권지 승문원 부정자, 승문원 부정자(종9품), 정자(정9품), 저작(정8품), 봉상시 직장(종7품) 겸 승문원 박사(정7품), 성균관 전적(정6품), 사헌부 감찰(정6품), 예조 정랑(정5품)을 거쳐 1818년(순조 18) 6월 25일에 병조 좌랑으로 임명된다. 이때 이원조의 나이 27세이다. 조선시대에는 양반 경관직, 특히 문반직이 관직후보자들의 수에 비해 극히 적었으므로 그 교체가 매우 빈번하였다. 이로 인해 관리들은 해당업무에 숙달하기 어려웠고 행정의 능률도 떨어지는 문제가 있었으므로, 특수한 기술이나 경험을 요구하는 직임에는 약간의 장기근무자를 확보하도록 규정하는 제도[久任法]가 있었다. 병조 좌랑은 久任官 이었다. 그러나 『승정원일기』를 살펴보면 1년 정도 직을 수행하던 이원조는 다음해에 체직을 요청하고 있다. 1819년(순조 19년) 6월 18일 정사를 통해 병조에서 임금에게 아뢴 것을 보면, 이원조가 몸의 병이 위독해져 여러번 체직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병조 좌랑의 직은 매우 중요하여 오래 비어둘 수 없으니 改差해 달라고 청해 임금의 허락을 받게 된다.
이원조(1792~1871)는 자가 周賢이며, 호는 凝窩이다. 초명은 李永祚이고, 1812년에 개명하였다. 생원 李亨鎭의 아들로 태어나 백부 李奎鎭의 양자가 되었다. 18세에 증광문과에 급제하였고, 제주목사, 한성판윤, 공조판서, 판의금부사 등을 역임하여, 조선후기 노론 집권기에 남인으로서는 드물게 1품의 반열에 올랐다. 학문적으로는 영남 주리론 계열의 대표적인 학자로서 鄭宗魯柳致明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의 성리학 사상은 조카 李震相에게 전해졌다.
배재홍, 『退溪學과 韓國文化』39, 경북대 퇴계학 연구소, 2006
鄭求福, 『古文書硏究』 9·10, 한국고문서학회, 1996
유지영, 『古文書硏究』 30, 한국고문서학회, 2007
『승정원일기』,
『응와 선생 문집』,
서은주

이미지

원문 텍스트

1818년 이원조(李源祚) 고신(告身)

敎旨
李源祚通訓
大夫行兵曺佐

嘉慶二十三年六月二十五日
吏吏安至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