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6년(순조 16) 6월 25일, 이조가 국왕의 명령을 받들어 승문원 박사 이원조를 승의랑 행 봉상시 직장 겸 승문원 박사로 임명하는 4품 이하 고신[敎牒]
내용 및 특징
1816년(순조 16) 6월 25일에 이조가 국왕의 명령을 받들어 승문원 박사 이원조를 승의랑 행 봉상시 직장 겸 승문원 박사로 임명하는 4품 이하 고신[敎牒]이다. 발급일자 위에 이조의 관인이 답인되어 있으며, 이조판서가 서압하였다.
승문원은 조선시대 사대교린에 관한 문서를 관장하기 위해 설치한 관서로 槐院이라고도 하였으며, 소속 관원은 모두 문관으로만 임용하였다. 승문원에 소속된 관직 가운데 博士는 정7품으로 3員이 정원이었다. 봉상시 직장은 종7품으로 승문원의 박사나 저작 중에 골라서 겸직으로 1원을 임명하였다. 承議郞은 문관 정6품 상계에 해당하는 품계 명칭이다. 품계와 관직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行守法에 따라 관직이 품계보다 낮은 경우인 ‘行’을 품계와 관직 사이에 썼다.
이조가 국왕의 명령을 받는 일자는 가경 21년(순조 16) 6월 25일이다.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이 일자에 이조판서 朴宗慶과 도승지 金履喬가 참석한 가운데 政事를 열어, 이원조를 봉상시 직장에 單付하기로 결정하였다.
뒷면 좌측 하단에는 ‘吏吏安宙成’이라고 적혀있다. ‘吏吏’는 ‘이조의 서리’라는 의미이고, ‘안주성’은 문서를 작성한 서리의 성명이다. 이와 같이 고신에는 뒷면 좌측하단에 문서 작성자가 기입되어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성주 이씨 이원조 가문이 소장하고 있는 고신의 뒷부분을 보면, 안주성뿐 아니라 ‘安奎澈’, ‘安宇成’, ‘安處得’, ‘安至默’, ‘安鍾允’, ‘安允鼎’ 등 안씨 성을 가진 서리의 이름이 연속적으로 등장한다. 이는 이조에 근무하는 서리 가운데 안씨 성이 대를 이어 성주이씨 가문의 단골서리 역할을 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짐작된다.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이원조는 문과급제 후 권지 승문원 부정자, 승문원 부정자(종9품), 정자(정9품), 저작(정8품)을 거쳐 본 고신을 받기 전인 1816년(순조 16) 5월 14일에 있었던 정사를 통해 단독후보자로 승문원 박사(정7품)로 승진되었다. 이원조는 이어 한달 뒤인 6월 25일 정사에서 겸직으로 봉상시 직장(종7품)을 임명받게 된다. 봉상시 직장은 승문원의 박사나 저작 중에 골라서 1원을 임명하였기 때문이다. 봉상시는 조선시대 국가의 제사 및 시호를 의론하여 정하는 일을 관장하기 위해 설치되었던 관서이다. 4품 이하관은 모두 문과출신자로 충원하였다. 봉상시는 제사를 관장하는 기관이기 때문에 여러 寺 ․ 監으로 불리는 관사 중에서는 최상위에 기재하였다.
그러나 보름 뒤인 7월 11일에 있었던 정사를 통해 이조에서 임금에게 아뢴 것을 보면, 새로 제수된 봉상시 직장 이원조가 제수된 이후 사은숙배를 기한 내에 하지 않아 의례대로 改差하기를 청해 임금의 허락을 받게 된다. 『經國大典』 朝儀를 살펴보면, 동반 9품 ․ 서반 4품 이상 관직을 받은 자는 제수된 다음날에 대전 ․ 왕비전 ․ 왕세자궁에 사은숙배해야 했다. 이후 이원조는 2달 뒤인 9월 23일 이전에 이미 마음 놓기가 어렵다는 이유로 교체자를 기다리지 않고 고향인 성주로 내려간 것으로 보인다. 이후 다시 가주서로 임명받기도 하지만 계속해서 재외에 머물고 있어 12월 17일 정사에서 휴가를 받고서 기한 내에 상경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승문원 박사에서도 의례대로 파직되게 된다.
이원조(1792~1871)는 자가 周賢이며, 호는 凝窩이다. 초명은 李永祚이고, 1812년에 개명하였다. 생원 李亨鎭의 아들로 태어나 백부 李奎鎭의 양자가 되었다. 18세에 증광문과에 급제하였고, 제주목사, 한성판윤, 공조판서, 판의금부사 등을 역임하여, 조선후기 노론 집권기에 남인으로서는 드물게 1품의 반열에 올랐다. 학문적으로는 영남 주리론 계열의 대표적인 학자로서 鄭宗魯와 柳致明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의 성리학 사상은 조카 李震相에게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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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求福, 『古文書硏究』 9·10, 한국고문서학회,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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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
『응와 선생 문집』,
서은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