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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5년 이원조(李源祚) 고신(告身)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K05+KSM-XA.1815.1100-20130630.E4784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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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교령류-고신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정치/행정-임면-고신
작성주체 이원조, 이조
작성지역 서울특별시
작성시기 1815
형태사항 크기: 58 X 80
장정: 낱장
수량: 1장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성주 한개 성산이씨 응와종택 /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안내정보

1815년 이원조(李源祚) 고신(告身)
1815년(순조 15) 10월 17일, 이조가 국왕의 명령을 받들어 권지 승문원 부정자 이원조계공랑 행 승문원 부정자로 임명하는 4품 이하 고신(교첩)이다. 이원조는 18세에 문과급제 후 가주서, 권지 승문원 부정자를 거쳐 24세 때에 본 임명장을 받고 실직인 계공랑 행 승문원 부정자를 제수 받음으로써 임시직이라는 꼬리표를 떼고 본격적인 관직생활에 나서게 되었다. 과거에 합격한 지 6년만이다.
배재홍, 『退溪學과 韓國文化』39, 경북대 퇴계학 연구소, 2006
鄭求福, 『古文書硏究』 9·10, 한국고문서학회, 1996
유지영, 『古文書硏究』 30, 한국고문서학회, 2007
『승정원일기』,
『응와 선생 문집』,
서은주

상세정보

1815년 10월 17일, 이조가 국왕의 명령을 받들어 권지 승문원 부정자 이원조계공랑 행 승문원 부정자로 임명하는 4품 이하 고신[敎牒]
내용 및 특징
1815년(순조 15) 10월 17일에 이조가 국왕의 명령을 받들어 권지 승문원 부정자 이원조계공랑 행 승문원 부정자로 임명하는 4품 이하 고신[敎牒]이다. 발급일자 위에 이조의 관인이 답인되어 있으며, 이조판서가 서압하였다.
승문원은 조선시대 사대교린에 관한 문서를 관장하기 위해 설치한 관서로 槐院이라고도 하였으며, 소속 관원은 모두 문관으로만 임용하였다. 권지는 조선시대 과거합격자로서 성균관ㆍ승문원ㆍ교서관ㆍ훈련원ㆍ별시위 등에 분관되어 임용 대기 중인 견습 관원이다. 승문원에 소속된 관직 가운데 副正字는 종9품으로 2員이 정원이었다. 啓功郞은 문관 종7품에 해당하는 품계 명칭이다. 품계와 관직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行守法에 따라 관직이 품계보다 낮은 경우인 ‘行’을 품계와 관직 사이에 썼다.
이조가 국왕의 명령을 받는 일자는 가경 20년(순조 15) 10월 17일이다.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이 일자에 이조판서 李肇源동부승지 韓耆裕가 참석한 가운데 政事를 열어, 이원조부정자에 單付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원조는 1809년(순조 9) 12월 1일, 나이 18세에 增廣試 을과 제6인으로 문과에 급제한 후 12월 7일에 假注書로 임명 받았다. 가주서 임명 얼마 뒤인 12월 19일에는 『경국대전』 「예전」 諸科에 따라 승문원에 권지부정자로 分館된다(승정원일기 순조 9년 12월 19일). 그런데 그는 승문원에 분관된 뒤 다음해(1810년, 순조 10) 6월 이후 다시 가주서로 체직된 것 같다. 가주서는 비록 주서의 유고시에 임명되던 임시직이지만 반드시 장래성이 있는 참하 문관 중에서 선임하였다. 가주서로 있다가 바로 실직에 제수되는 자가 많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가주서에 임명되는 것을 영예롭게 생각하였고 또 승정원에서의 대우도 좋았다.
『승정원일기』를 살펴보면 문과급제 후 2~3년을 가주서로서 관직생활을 보내던 이원조는 21세 때인 1812년(순조 12년) 8월 이전 어느 시기에 다시 권지 승문원 부정자로 임명된 것 같다. 과거 합격한 지 3년만이다. 이처럼 조선후기에는 과거 급제자의 급증으로 분관인 적체되어 급제 후 3~4년이 지나도 분관되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였다. 어쨌든 그는 비로소 승문원에 분관되면서 관직생활을 새롭게 시작하는 셈이 되었다. 그 후 24세 때인 1815년(순조 15년) 10월에는 본 임명장을 받고 실직인 계공랑 행 승문원 부정자를 제수 받음으로써 권지라는 꼬리표를 떼고 본격적인 관직생활에 나서게 되었다. 과거에 합격한 지 6년만이고 실제 승문원에 분관된 지는 3년만이다.
이원조(1792~1871)는 자가 周賢이며, 호는 凝窩이다. 초명은 李永祚이고, 1812년에 개명하였다. 생원 李亨鎭의 아들로 태어나 백부 李奎鎭의 양자가 되었다. 18세에 증광문과에 급제하였고, 제주목사, 한성판윤, 공조판서, 판의금부사 등을 역임하여, 조선후기 노론 집권기에 남인으로서는 드물게 1품의 반열에 올랐다. 학문적으로는 영남 주리론 계열의 대표적인 학자로서 鄭宗魯柳致明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의 성리학 사상은 조카 李震相에게 전해졌다.
배재홍, 『退溪學과 韓國文化』39, 경북대 퇴계학 연구소, 2006
鄭求福, 『古文書硏究』 9·10, 한국고문서학회, 1996
유지영, 『古文書硏究』 30, 한국고문서학회, 2007
『승정원일기』,
『응와 선생 문집』,
서은주

이미지

원문 텍스트

1815년 이원조(李源祚) 고신(告身)

吏曹嘉慶二十年十月
十七日 奉
權知承文院副正字李源祚
啓功郞行承文院副正

嘉慶二十年十月日
判書臣李[署押]
參判
參議
正郞
佐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