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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3년 이규진(李奎鎭) 유지(有旨)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K05+KSM-XA.1813.1100-20130630.E47840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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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교령류-유지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국왕/왕실-교령-유지
작성주체 이규진, 승정원
작성지역 서울특별시
작성시기 1813
형태사항 크기: 53.5 X 79
장정: 낱장
수량: 1장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성주 한개 성산이씨 응와종택 /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안내정보

1813년 이규진(李奎鎭) 유지(有旨)
1813년(순조 13) 5월 22일, 승정원이 국왕의 명령을 받들어 이규진사헌부 장령으로 임명하니 속히 상경하라고 발급한 유지이다. 이규진1799년 문과에서 장원급제 한 뒤 여러 관직을 역임한다. 그러나 1804년 이후 아버지의 병환으로 인해 부임지로 떠나기 어렵다는 이유로 사직서를 제출한 이후에는 관직 생활을 하지 않고 고향인 성주에 머무르는 것으로 보인다. 7년 뒤인 1811년에는 병조 정랑을 제수 받지만 병으로 인한 사직서를 제출하고 계속해서 재외에 머무른다. 1813년 5월 10일 사헌부 장령을 임명받지만 역시 고향인 성주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5월 22일에 이 유지를 발급한 것이다. 그러나 『승정원일기』를 보면 사헌부 장령으로 부임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배재홍, 『退溪學과 韓國文化』39, 경북대 퇴계학 연구소, 2006
鄭求福, 『古文書硏究』 9·10, 한국고문서학회, 1996
유지영, 『古文書硏究』 30, 한국고문서학회, 2007
『승정원일기』,
『응와 선생 문집』,
서은주

상세정보

1813년 5월 22일, 승정원에서 국왕의 명령을 받들어 이규진통훈대부 행 사헌부 장령으로 임명하니 속히 상경하라고 발급한 有旨
내용 및 특징
1813년(순조 13) 5월 22일 승정원에서 국왕의 명령을 받들어 이규진사헌부 장령으로 임명하니 속히 상경하라고 발급한 有旨이다. 발급일자 위에 ‘承政院印’이 답인되어 있으며, 동부승지가 서압하였다.
사헌부는 조선시대 언론 활동, 풍속 교정, 백관에 대한 규찰과 탄핵 등을 관장하던 관청이다. 霜臺 ․ 烏臺 · 柏府라고도 한다. 사헌부에 소속된 관직 가운데 掌令은 정4품으로 2員이 정원이었다.
승정원이 국왕의 명령을 받는 일자는 가경 18년(순조 13) 5월 22일이다.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이날 있었던 어전회의에서 사헌부 장령 南達孫사헌부 장령으로 새로 제수된 이규진이 지금 경상도 성주에 있다면서 속히 상경하라는 임금의 명령을 내릴 것을 청해 임금에게 윤허 받았다. 이에 따라 승정원에서 이 문서를 발급하였다. 뒷면에는 ‘司憲府掌令李奎鎭開圻’이라고 쓰여 있다. 뜻은 ‘사헌부 장령 이규진은 열어보라’는 말로 다른 사람은 열어볼 수 없다. 왕명서로서 유지의 중요성은 『속대전』에 법제화하여 나타나는데, 만약 이 문서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하면[棄置] 전달을 맡은 撥卒은 일률적으로 중벌로 다스리고 해당 수령은 拿處하도록 규정하였다.
이규진은 36세인 1799년(정조 23) 9월 문과에서 장원급제 한 뒤 성균관 전적(정6품), 병조 좌랑(정6품), 사헌부 감찰(정6품)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품계도 약 5년 만에 승의랑(정6품), 조봉대부(종4품)를 거쳐 당하관의 최상인 통훈대부(정3품)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1804년(순조 4) 2월 13일에 강원도 도사(종5품)라는 외관직을 임명받고서 아버지의 병환으로 인해 부임지로 떠나기 어렵다는 이유로 사직서를 제출한 이후엔 正史기록에 그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계속 고향인 성주에 머무르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7년 뒤인 1811년(순조 11) 3월 17일에 종부시 주부(종6품)의 임명을 받고 한 달 뒤인 윤3월에는 久任官인 병조 정랑(정5품)을 제수 받는다. 그러나 이규진은 5개월 뒤인 8월 11일에 병으로 인한 사직서를 제출해서 임금의 허락을 받게 된다. 이후 사헌부 감찰(정6품), 사직서 령(종5품), 사헌부 지평(정5품)에 임명되었으며 1813년(순조 13) 5월 10일에는 사헌부 장령(정4품)을 임명받게 된다. 이때 이규진의 나이 50세이다. 그러나 이규진은 고향인 성주에 계속해서 머무르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이규진이 재외에 있다는 기록이 계속 보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5월 22일에 이 유지를 발급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후에도 2달 동안『승정원일기』에는 이규진이 재외에 있다거나 사은숙배를 하지 않았다거나 또는 사직상소를 올리고 그에 따른 추국도 있다고 하여 사헌부 장령으로 부임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규진(1763~1822)은 本貫은 星山이다. 字는 而拱이며 號는 農棲이다. 父는 李敏謙이고 祖父는 李碩文이다. 거주지는 星州이며. 鄭宗魯의 문인이다. 1783년 式年試 3등으로 생원에 합격하여 1799년 謁聖試 장원으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왕으로부터 朱子書百選을 상으로 받았다. 左贊成에 증직된다. 유고가 전한다.
배재홍, 『退溪學과 韓國文化』39, 경북대 퇴계학 연구소, 2006
鄭求福, 『古文書硏究』 9·10, 한국고문서학회, 1996
유지영, 『古文書硏究』 30, 한국고문서학회, 2007
『승정원일기』,
『응와 선생 문집』,
서은주

이미지

원문 텍스트

1813년 이규진(李奎鎭) 유지(有旨)

同副承旨南[署押]
今以爾 爲司憲府
掌令
爾其斯速乘
馹上來事有

嘉慶十八年五月二十二日
司憲府掌令李奎鎭開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