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디렉토리 분류

1811년 이규진(李奎鎭) 고신(告身)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K05+KSM-XA.1811.1100-20130630.E47840138
URL
복사
복사하기

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교령류-고신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정치/행정-임면-고신
작성주체 순조, 이규진
작성지역 서울특별시
작성시기 1811
형태사항 크기: 57.5 X 77
장정: 낱장
수량: 1장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성주 한개 성산이씨 응와종택 /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안내정보

1811년 이규진(李奎鎭) 고신(告身)
1811년(순조 11) 윤3월 16일, 국왕이 이규진통훈대부 행 병조 정랑으로 임명하는 4품 이상 고신(교지)이다. 이규진1799년 문과에서 장원급제 한 뒤 여러 관직을 역임한다. 그러다가 강원도 도사라는 외관직을 임명받고서 아버지의 병환으로 인해 부임지로 떠나기 어렵다는 이유로 사직서를 제출한 이후에는 관직 생활을 하지 않고 고향인 성주에 머무르는 것으로 보인다. 1811년에 다시 종부시 주부, 병조 정랑을 임명받게 되지만 『승정원일기』를 살펴보면 이규진이 병으로 인해 병조 정랑을 사임했음을 알 수 있다.
배재홍, 『退溪學과 韓國文化』39, 경북대 퇴계학 연구소, 2006
鄭求福, 『古文書硏究』 9·10, 한국고문서학회, 1996
유지영, 『古文書硏究』 30, 한국고문서학회, 2007
『승정원일기』,
『응와 선생 문집』,
서은주

상세정보

1811년 윤3월 16일, 국왕이 이규진통훈대부 행 병조 정랑으로 임명하는 4품 이상 고신[敎旨]
내용 및 특징
1811년(순조 11) 윤3월 16일 국왕이 이규진통훈대부 행 병조 정랑으로 임명하는 4품 이상 고신[敎旨]이다. 발급일자 위에 어보인 ‘施命之寶’가 답인되어 있다.
병조는 조선시대 군사관계 업무를 총괄하던 중추적 기관이다. 6조의 하나로 夏官 · 西銓이라고도 한다. 병조에 소속된 관직 가운데 正郞은 정5품으로 4員이 정원이었다. 通訓大夫는 문관 정3품 하계에 해당하는 품계 명칭으로 당하관의 최상이다. 품계와 관직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行守法에 따라 관직이 품계보다 낮은 경우인 ‘行’을 품계와 관직 사이에 썼다.
국왕이 명령을 내린 일자는 가경 16년(순조 11) 윤3월 16일이다.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이 일자에 이조가 口傳으로 政事에서, 이규진병조 정랑에 삼기로 결정하였다.
뒷면 좌측 하단에는 ‘吏吏安宙成’이라고 적혀있다. ‘吏吏’는 ‘이조의 서리’라는 의미이고, ‘안주성’은 문서를 작성한 서리의 성명이다. 이와 같이 고신에는 뒷면 좌측하단에 문서 작성자가 기입되어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성산 이씨 이원조 가문이 소장하고 있는 고신의 뒷부분을 보면, 안주성뿐 아니라 ‘安奎澈’, ‘安宇成’, ‘安處得’, ‘安至默’, ‘安鍾允’, ‘安允鼎’ 등 안씨 성을 가진 서리의 이름이 연속적으로 등장한다. 이는 이조에 근무하는 서리 가운데 안씨 성이 대를 이어 성주이씨 가문의 단골서리 역할을 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짐작된다.
이규진은 36세인 1799년(정조 23) 9월 문과에서 장원급제 한뒤 성균관 전적(정6품), 병조 좌랑(정6품), 사헌부 감찰(정6품)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품계도 약 5년만에 승의랑(정6품), 조봉대부(종4품)를 거쳐 당하관의 최상인 통훈대부(정3품)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1804년(순조 4) 2월 13일에 강원도 도사(종5품)라는 외관직을 임명받고서 아버지의 병환으로 인해 부임지로 떠나기 어렵다는 이유로 사직서를 제출한 이후엔 正史기록에 그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계속 고향인 성주에 머무르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7년 뒤인 1811년(순조 11) 3월 17일에 종부시 주부(종6품)를 임명받았다가 약 한달 뒤인 윤3월 16일에 다시 병조 정랑(정5품)으로 임명받게 되는 것이다. 병조 정랑은 久任官이며, 이때 이규진의 나이 48세이다. 그러나 『승정원일기』를 통해 5개월 뒤인 8월 11일 병조에서 임금에게 아뢴 것을 보면, 병조 정랑 이규진이 몸의 병이 들어 병세가 별안간 위독해져 여러 차례 사직서를 통해 체직을 요청하는데 병조 좌랑 직은 매우 중요하여 오랫동안 비워둘 수 없으니 지금 우선 改差함이 어떠한지를 여쭈어 임금의 허락을 받고 있다. 이를 통해 이규진병조 정랑을 병으로 인해 사임했음을 알 수 있다.
이규진(1763~1822)은 本貫은 星山이다. 字는 而拱이며 號는 農棲이다. 父는 李敏謙이고 祖父는 李碩文이다. 거주지는 星州이며. 鄭宗魯의 문인이다. 1783년 式年試 3등으로 생원에 합격하여 1799년 謁聖試 장원으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왕으로부터 朱子書百選을 상으로 받았다. 左贊成에 증직된다. 유고가 전한다.
배재홍, 『退溪學과 韓國文化』39, 경북대 퇴계학 연구소, 2006
鄭求福, 『古文書硏究』 9·10, 한국고문서학회, 1996
유지영, 『古文書硏究』 30, 한국고문서학회, 2007
『승정원일기』,
『응와 선생 문집』,
서은주

이미지

원문 텍스트

1811년 이규진(李奎鎭) 고신(告身)

敎旨
李奎鎭通訓
大夫行兵曹正

嘉慶十六年閏三月日
吏吏安宙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