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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9년 이영조(李永祚) 홍패(紅牌)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K05+KSM-XA.1809.1100-20130630.E478400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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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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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교령류-홍패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정치/행정-과거-홍패
작성주체 순조, 이영조
작성지역 서울특별시
작성시기 1809
형태사항 크기: 91 X 66
장정: 낱장
수량: 1장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성주 한개 성산이씨 응와종택 /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안내정보

1809년 이영조(李永祚) 홍패(紅牌)
1809년 12월 1일, 순조이영조에게 문과 9등으로 합격한 것을 증명하여 발급해준 문서이다. 문과에 합격 당시 그는 18세였고 유학 신분이었는데 이는 매우 이른 나이에 급제한 것이었다. 이후 이영조는 관례에 따라 승문원에 배속되었으며 종7품 계공랑에 임명된다.
박현순, 『사학연구』93,한국사학회, 2009
배재홍, 『退溪學과 韓國文化』39, 경북대 퇴계학 연구소, 2006
鄭求福, 『古文書硏究』 9·10, 한국고문서학회, 1996
유지영, 『古文書硏究』 30, 한국고문서학회, 2007
『조선시대 생원진사 연구』, 최진옥, 집문당, 1998
『經國大典』,
『승정원일기』,
『經國大典』,
김인호

상세정보

1809년(순조 9) 12월 1일, 국왕이 이영조에게 문과 을과에 제6인으로 합격한 것을 증명하여 발급한 문과 급제 증서
내용 및 특징
1809년(순조 9) 12월 1일, 국왕이 李永祚에게 문과 을과에 제6인으로 합격한 것을 증명하여 발급한 문과 급제 증서이다. 문과에 급제한 자에게 내리는 문서를 홍패라고 하며 연호의 두 번째 글자 위에 ‘科擧之寶’를 찍는다.
1809년 시행된 시험은 원자인 효명세자의 탄생을 축하하여 설행된 경과로 춘당시 별시였다. 문과에서는 각각 甲科에 3인, 乙科에 7인, 丙科에 23인을 배정하여 총 33인을 뽑도록 하였으나 적합한 인재가 많을 때에는 더 뽑기도 하였다. 이영조는 을과 6인으로 급제하였으므로, 이는 전체 9등으로 합격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뒷면 표지에는 황색 종이 위에 ‘幼學李永祚文科乙科弟六人’을 한 줄로 써서 문과 급제자의 당시 신분, 이름 및 성적을 표시하였다.
문과 합격 당시 이영조는 18세로 유학의 신분이었다. 19세기 문과 급제자의 평균 연령이 대체로 30대 중·후반이었음을 감안하면 그는 매우 이른 나이에 급제한 것이었다. 실재로 순조대에는 과거 급제자 총 1,053명중 10대 급제자는 12명에 불가하였다. 이영조가 어린 나이에 과거에 급제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일찍이 12세 때부터 과거에 뜻을 두고 부지런히 대비하였기 때문이었다. 그가 과거에 합격하고 쓴 시인 「자면음」에서, ‘나는 일찍이 과거에 응시하였는데 문예에 재주가 약간 있었으므로 스스로 이만하면 한 시대를 다스릴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 방자하게 功名을 이룰 것을 스스로 기약하였다.’고 자부한 모습을 통해 그가 과거에 들인 노력을 알 수 있다. 또한 이영조가 유학이라는 신분으로 과거에 응시한 모습을 통해 조선 후기 과거 응시 자격 조건이 완화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16세기 조선은 문과 응시와 관련하여 圓點규정을 두어 생원·진사가 아닌 유학들은 아예 문과에 응시할 수 없게 하였다. 하지만 이 규정은 17세기에 폐지되면서 유학들의 과거 응시에 아무런 제약이 없어지게 된다. 결국 17세기 이후 과거 응시에 유학의 수가 급증하게 되면서 이영조가 과거에 응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문과에 급제하면 갑과 1등은 종6품, 갑과 2등과 3등은 정7품, 을과는 정8품, 병과는 정9품을 제수되었다. 이 원칙대로라면 이영조는 정8품 通仕郞에 제수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 이전에 이영조가 종9품 將仕郞에 代加되었기 때문에 『경국대전』 「예전」 諸科조에 ‘其所加與應授階相等者·不及者, 於應授階, 又加一階’의 규정에 따라 종7품 啓功郞에 제수된다. 또한 과거 합격 후 이영조는 관례에 따라 承文院에 分館된다.
이원조(1792~1871)는 자가 周賢이며, 호는 凝窩이다. 초명은 李永祚이고, 1812년에 개명하였다. 생원 李亨鎭의 아들로 태어나 백부 李奎鎭의 양자가 되었다. 18세에 증광문과에 급제하였고, 제주목사, 한성판윤, 공조판서, 판의금부사 등을 역임하여, 조선후기 노론 집권기에 남인으로서는 드물게 1품의 반열에 올랐다. 학문적으로는 영남 주리론 계열의 대표적인 학자로서 鄭宗魯柳致明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의 성리학 사상은 조카 李震相에게 전해졌다.
박현순, 『사학연구』93,한국사학회, 2009
배재홍, 『退溪學과 韓國文化』39, 경북대 퇴계학 연구소, 2006
鄭求福, 『古文書硏究』 9·10, 한국고문서학회, 1996
유지영, 『古文書硏究』 30, 한국고문서학회, 2007
『조선시대 생원진사 연구』, 최진옥, 집문당, 1998
『經國大典』,
『승정원일기』 ,
『응와 선생 문집』,
김인호

이미지

원문 텍스트

1809년 이영조(李永祚) 홍패(紅牌)

幼學李永祚文科乙科第六人
敎旨
幼學李永祚文科乙科
第六人及第出身者
嘉慶十四年 十二月 初一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