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3년 3월 12일, 국왕이 이규진을 조봉대부 행 성균관 전적으로 임명하는 4품 이상 고신[敎旨]
내용 및 특징
1803년(순조 3) 3월 12일에 국왕이 이규진을 조봉대부 행 성균관 전적으로 임명하는 4품 이상 고신[敎旨]이다. 발급일자 위에 어보인 ‘施命之寶’가 답인되어 있다.
성균관은 조선시대에 인재양성을 위하여 서울에 설치한 국립대학격의 유학교육기관이다. 太學 · 泮宮 · 賢關 · 芹宮 · 首善之地라고도 하였다. 성균관에 소속된 관직 가운데 典籍은 정6품으로 13員이 정원이었다. 朝奉大夫는 문관 종4품 하계에 해당하는 품계 명칭이다. 품계와 관직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行守法에 따라 관직이 품계보다 낮은 경우인 ‘行’을 품계와 관직 사이에 썼다.
국왕이 명령을 내린 일자는 가경 8년(순조 3) 3월 12일이다.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이 일자에 이조참판 金達淳과 좌부승지 權襈이 참석한 가운데 政事를 열어, 이규진을 전적에 삼기로 결정하였다.
뒷면 좌측 하단에는 ‘吏吏安處得’이라고 적혀있다. ‘吏吏’는 ‘이조의 서리’라는 의미이고, ‘안처득’은 문서를 작성한 서리의 성명이다. 이와 같이 고신에는 뒷면 좌측하단에 문서 작성자가 기입되어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성산이씨 이원조 가문이 소장하고 있는 고신의 뒷부분을 보면, 안처득뿐 아니라 ‘安奎澈’, ‘安宇成’, ‘安宙成’, ‘安至默’, ‘安鍾允’, ‘安允鼎’ 등 안씨 성을 가진 서리의 이름이 연속적으로 등장한다. 이는 이조에 근무하는 서리 가운데 안씨 성이 대를 이어 성산이씨 가문의 단골서리 역할을 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짐작된다.
이규진은 36세인 1799년(정조 23) 9월 30일에 있었던 문과에서 장원으로 급제한 뒤 당일 승의랑 성균관 전적(정6품)을 제수 받게 된다. 그리고 3일 뒤 다시 승의랑 병조 좌랑(정6품)으로 이직된다. 병조 좌랑은 久任官이다. 久任法에 따라 병조 좌랑 직을 수행하던 이규진은 4년 뒤인 1803년 3월 12일에 품계가 올라 종4품 조봉대부를 임명받고 관직은 성균관 전적(정6품)으로 이직된다. 이때 이규진의 나이 40세이다.
이규진(1763~1822)은 本貫은 星山이다. 字는 而拱이며 號는 農棲이다. 父는 李敏謙이고 祖父는 李碩文이다. 거주지는 星州이며. 鄭宗魯의 문인이다. 1783년 式年試 3등으로 생원에 합격하여 1799년 謁聖試 장원으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왕으로부터 朱子書百選을 상으로 받았다. 左贊成에 증직된다. 유고가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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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
『응와 선생 문집』,
서은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