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0년(영조 26) 1월, 국왕이 이석문을 어모장군 무신겸선전관에 임명한 4품 이상 고신
내용 및 특징
1750년(영조 26) 1월에 이석문을 어모장군 무신겸선전관에 임명하는 문무관 4품 이상 고신(敎旨)이다. 발급일자 위에 ‘施命之寶’가 안보되어 있다. 어모장군은 정3품 당하관에 해당하는 무관 품계명칭이다.
이 고신이 발급된 일자는 건륭 15년(영조 26) 정월이다.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1750년 1월 26일 병조 판서 金尙魯, 병조 참판 徐命九, 병조 참의 金相奭, 병조 참지 吳遂采와 좌부승지 宋昌明가 참석한 가운데 政事를 열어 이석문을 武兼와 神方仇非 萬戶에 임명하였다.
선전관은 조선시대에 形名, 계라, 시위, 전명 및 符信의 출납을 맡았던 무관직이다. 선전관은 近侍의 임무를 지므로 청요직으로 간주되었으며, 또한 장차 무반(武班)의 중추가 될 인재란 점에서 무재가 있고 효용한 사람을 뽑아 임명하고 끊임없이 무예와 병법을 연마시키기로 되어 있었다. 영조 대에는 21인이 정원이었다. 그 밖에 별도로 문무관직을 갖고 있는 자에게 겸직하게 하는 겸선전관이 있었다. 종6품의 문관이 겸하는 선전관을 문신선전관이라 하였고 정원인 5인이었다. 종6품의 무관과 종9품의 무관이 겸하는 각각 겸하는 선전관을 무신선전관이라 하였다. 정원은 종6품 겸직 38인, 종9품 겸직 12인이었다.
이석문(1713~1773)은 호가 遯齋이며, 北扉公이라 불리웠다. 1739년(영조 15) 무과에 급제하고 宣傳官이 되었다. 1750년(영조 26) 대리청정하던 사도세자의 발탁으로 武兼宣傳官이 되었다가 얼마 후 낙향하였다. 1762년(영조 38) 임오화변 때에 사도세자를 사사하고자 하는 영조의 명령으로 휘녕전 합문이 폐쇄되었는데, 당시 무신겸선전관으로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던 이석문은 세손(정조)을 모시고 안으로 들어가고자 하였으나 수문장에게 제지당하였다. 이에 이석문은 세손을 등에 업고 문을 밀치고 들어가, 세손이 영조를 뵙고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호소할 수 있게 하였다. 이 일로 이석문은 삭탈관직 당하여 낙향하였다. 그 뒤 영조가 출사할 것을 명하였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았고, 대문을 북쪽으로 옮겨 사도세자를 그리워하였다.(北扉公) 후일 손자인 李奎鎭이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자, 정조가 특별히 불러 조부의 일을 하문하고, 朱子書百選을 상으로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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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
『응와 선생 문집』,
명경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