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0년 3월 27일, 이만인이 천전에 가서 임하구곡 등을 감상하고 돌아와서 처조카인 김병황에게 자신의 근황을 전하는 편지
내용 및 특징
1890년(高宗 27) 3월 27일, 李晩寅이 川前에 가서 臨河九谷 등 유적지를 돌아보고 돌아와서 처조카인 金秉璜에게 자신의 근황을 전하는 편지이다.
渭瑞는 김병황의 자로, 편지를 쓴 이만인에게는 처조카가 된다. 이만인은 김병황과 계속 엇갈리는 상황에 대해 아쉬움을 서두에서 표현하고 있다. 김병황의 모친과 형제들의 안부를 묻고, 자신이 노년을 앞에 두니 같이 나이 들어가는 김병황도 염려가 된다고 하였다. 당시 이만인은 57세, 김병황은 46세로 김병황 역시 장년의 나이를 넘어서고 있었기에 이런 말을 한 것이다. 또 젊은 시절 함께 어울리던 김병황의 재종조가 오랜 지병으로 갑자기 돌아가시어 매우 침통하다고 하였다.
자신은 지난달에 川前에 있는 나이 많은 고모에게 문후 드리고 여러 벗들과 臨河九谷을 거슬러 올라가며 경치를 감상하고, 李玄逸(1627~1704)의 류적이 있는 錦水檀所에 갔다가 鄕飮酒禮를 행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朴谷에 있는 全州柳氏의 사당에 돌아가 대략 蘆厓翁 柳道源이 편집한 우리 선조의 문집을 교정하여 편지를 보냈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류도원이 교정한 책은 바로 『退溪先生文集攷證』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수십 일 정도를 여러 곳 다니다가 돌아와 큰집 종조부를 玉山의 두메산골에 이장하느라 피로하다고 하였다.
지금 처남 趙國胤이 燕나라 太子丹의 옛 고향에서 돌아왔다고 들었다고 하였는데, 바로 北京에서 돌아왔다는 말이다. 모레 가서 볼 생각이라고 하면서, 분주히 달려가 보는 것은 나이든 사람이 감당할 만한 것은 아니지만 세상사에 정신을 쏟고 한 달이 넘도록 쌀과 소금을 쓰는 것에 비하면 나쁘진 않다고 하였다. 근래 상대방이 사는 지역에는 大同禮가 성대하게 행해지고 있으니 좋은 일이라고 하면서, 다만 점진적으로 일을 추진하지 않고 급하게 서두르다보면 문제가 있을 수 있으니 조심하라고 조언을 하고 있다.
북쪽의 손님이 언제 돌아갈지 모르겠지만 서울 가는 김병황과는 공교롭게 어긋나니 조만간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彦兄은 편하게 지내고 있으며 馨姪은 행장을 꾸렸으니, 마땅히 泮村에서 만날 것이라고 하였는데, 彦兄과 馨姪은 이름에 ‘彦’과 ‘馨’이 들어가는 사람으로 정확하게 누구인지를 알 수 없다.
마침 김병황이 사는 지역의 손님이 돌아가기에 그 편에 편지를 부친다고 하였다. 그리고 작년 12월에 친척을 통해 김병황에게 분명히 편지 한 통을 부쳤는데 자신에게 답장을 안 보낸다고 하니, 혹 기억을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친척이 제대로 전하지 못한 것인지 확인하라고 하였다.
李晩寅(1834∼1897)의 자는 君宅이고, 호는 龍山이며, 초명은 李晩濩이다. 본관은 眞城으로, 退溪 李滉의 후손이다. 1872년(高宗 9) 과거 공부에 대한 뜻을 접고 학문 연구에 힘썼다. 1881년(高宗 18) 嶺南萬人疏 상소문의 원본을 작성하였다. 저서로 『龍山文集』이 있다. 이만인의 부인은 김병황의 고모이다.
김병황(金秉璜 ; 1845~1914)의 자는 渭瑞이고 호는 雲齋, 본관은 豊山, 斗欽의 손자이며 통덕랑을 지냈다.
柳道源(1721∼1791)의 자는 叔文, 호는 蘆厓로, 본관은 全州이다. 참의柳觀鉉의 아들로, 참의柳升鉉에게 입양되었다. 일찍이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과거를 보지 않고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저서로 『蘆厓集』, 『退溪先生文集攷證』, 『日警錄』등이 있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최연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