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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7년 이수영(李秀榮) 서간(書簡)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K04+KSM-XF.1887.4776-20120630.048725700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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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내용분류: 개인-생활-서간
작성주체 이수영, 이수악
작성지역 경상북도 영양군
작성시기 1887
형태사항 크기: 29.6 X 55
장정: 낱장
수량: 1장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영덕 오촌 재령이씨 존재종택 /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오촌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안내정보

1887년 이수영(李秀榮) 서간(書簡)
1887년 8월 20일, 이수영길주에 유배 간 이수악을 위로하기 위해 보낸 편지이다. 편지를 받고 유배지에 무사히 도착한 것을 알게 되어 위로된다고 하고, 가을 중의 안부를 물었다. 이어서 이중린 형을 그곳에서 만나 함께 공부 할 수 있는 사실에 감격해하면서, 근래에 읽고 있는 책을 묻고 그 형과 강론하도록 당부하고 있다. 자신은 수주로 찾아가고 싶지만 거리가 멀고 죄인의 몸이라 그럴 수 없다고 하였다. 또한 뜻은 있으나 이루지 못한 일이 많다고 하면서, 기력과 정신이 쇠한 것을 한탄하였다. 추신으로 진백 형에게는 편지를 쓰지 못했으니 다음 인편을 기약한다고 덧붙였다.
서진영

상세정보

1887년 8월 20일, 이수영이 위로차 길주에 유배되어 있는 이수악에게 보낸 편지
내용 및 특징
1887년(고종 24) 8월 20일, 族老 士實 李秀榮(1845-1916)이 위로차 吉州에 유배되어 있는 李壽岳(1845-1927)에게 보낸 편지이다.
4월에 보낸 편지를 받고 긴 유배 여정을 무사히 도달했다는 것을 알아 위로가 되었다고 하였다. 그 뒤로 이미 가을이 되었는데, 어떻게 지내는지를 물었다. 風土와 物情이 그다지 나쁘지 않고 수령이나 고을 학자들이 잘 대해주니, 葛庵 李玄逸(1627-1704)이 愁州(咸鏡道 鍾城)에서 유배되었을 때와 부합된다고 하였다. 朴明府朱斯文의 후의도 오늘날 보기 어려운 것이라고 하고, 더구나 李振伯(李中麟) 형은 吾黨의 준수한 선비로서 기약하지 않았는데도 그런 변경에서 만나 함께 조석으로 공부를 할 수 있다는 것은 하늘이 상대를 도와 완성시키려는 것이라고 감격해하면서, 근래에는 어떤 책을 읽고 있는지를 묻고, 부디 그 형과 강론을 하도록 부탁하고 있다. 또한 현재의 약간 편안함을 가지고 너무 안이하게 생각하지 말고 몸가짐을 조심하여 화를 초래하지 않기를 간절히 희망하였다. 愁州로 한 번 찾아가려는 생각이 있으나 거리가 먼 데다, 죄인의 몸으로 유람을 다녀서는 안 되겠기에 그럴 수 없다고 하였다. 자신은 날로 쇠해져 심신을 정리하여 온전하게 죽을 일만 남았다고 하고, 뜻이 있으나 이루지 못한 일이 많았는데, 기력과 정신이 쇠해져서 어쩌지 못하는 것을 한탄하였다. 오직 상대와 같은 이가 곁에 있어서 죽기 전의 일에 도움이 될 것이나, 그 또한 바랄 수 없는 일이라고 하고, 門內의 公事와 私事가 두서가 없는데 상대 같은 이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하였다.
추신으로, 振伯 兄에게는 편지를 쓰려고 했으나, 늙어서 빨리 쓰지를 못하는지라 후편을 기약한다고 하였다.
李壽岳은 반대 당파의 모함을 받아, 1886년(고종 23)에 영남의 명사였던 雲圃 李中麟, 泗上 李東弼 등과 함께 4년간 북쪽 변방에서 유배생활을 하였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권경열,최연숙

이미지

원문 텍스트

1887년 이수영(李秀榮) 서간(書簡)

吉州 旅館 壽岳 入納
石浦謝帖 謹封
自得四月書 粗知脩程到達無撓 客土
住着如宜 窮途之幸 在家者慰矣 厥後奴
還 亦已經侍 更未諳塞垣高秋
孤寄履況何如 攝身立命之方 固已有定力矣
果能隨遇安心 保得吾家天和性度耶
風土物情 旣不甚惡且貿 而主倅之接遇特
款厚 邑子之從遊不寂寞 又何其過望於
危蹤 而見符於愁州故事也 朴明府之衛道
好施 朱斯文之親德成業 尤不勝曠感於今日
而遙爲之頌祝獎勸之交切 矧伊李兄振伯 乃吾
黨之譽髦 不期而會此名勝於絶塞之外 使之
麗澤於朝夕者 夫豈偶然哉 殆天所以相我 而
資以爲玉成之地 近方看讀何書 羲經歟鄒傳 然期在瀜
貫濃熟 而須與此兄 劘切講究 可也 蓋其所望於相從之
益 不但爲羈管中破愁城消客日之適而已 凡
可以矯其偏而廣其業之務 皆從直諒友切偲中得
來 他日刮眼 槩可驗矣 如今處身 勿以少安而忘
危事 勿以無妨而忽焉 凡愼水土 謹樞機審應接防
訾摘 存戒酒色 皆是涉險之所當操守者 固知君
之足目 已先截然剖判於此箇六物 正不能不申之於過慮
之憂也 愁州一往之計 亦在所當而道理 若是濶遠 何必
多費讀書之日也 且罪縶之踪 不敢於玩適之行 古人所戒
也 此亦不可不審 如何 老漢 嶊陷之狀 又非復與君送別時
日 索之年例耳 奈何 只合整理身心 以聽歸全之是事 而惟是手分中 有志未就之事將多矣 今則氣苶神耗 奈强之不
得何 惟得有如君者在傍 庶幾有資於未化前事務 而此旣無望矣 凡門內公私事 此來尤覺沒管領 其間無幾何 而可驚
可羞 不一其端 有如亂船之無維楫 今不能一一提及焉 惟君主器者 每見有謹實氣像 是其無失 其爲保家子 是可
幸已 手廢筆
硏 君所知也 爲
千里面目 不
倩于人 玆不
成緖 不盡情
惟照諒在
丁亥八月二十日 族老 士實

振伯兄擬有書 而耋不
能應卒 恨恨 惟待後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