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7년 8월 20일, 이수영이 위로차 길주에 유배되어 있는 이수악에게 보낸 편지
내용 및 특징
1887년(고종 24) 8월 20일, 族老 士實 李秀榮(1845-1916)이 위로차 吉州에 유배되어 있는 李壽岳(1845-1927)에게 보낸 편지이다.
4월에 보낸 편지를 받고 긴 유배 여정을 무사히 도달했다는 것을 알아 위로가 되었다고 하였다. 그 뒤로 이미 가을이 되었는데, 어떻게 지내는지를 물었다. 風土와 物情이 그다지 나쁘지 않고 수령이나 고을 학자들이 잘 대해주니, 葛庵 李玄逸(1627-1704)이 愁州(咸鏡道 鍾城)에서 유배되었을 때와 부합된다고 하였다. 朴明府와 朱斯文의 후의도 오늘날 보기 어려운 것이라고 하고, 더구나 李振伯(李中麟) 형은 吾黨의 준수한 선비로서 기약하지 않았는데도 그런 변경에서 만나 함께 조석으로 공부를 할 수 있다는 것은 하늘이 상대를 도와 완성시키려는 것이라고 감격해하면서, 근래에는 어떤 책을 읽고 있는지를 묻고, 부디 그 형과 강론을 하도록 부탁하고 있다. 또한 현재의 약간 편안함을 가지고 너무 안이하게 생각하지 말고 몸가짐을 조심하여 화를 초래하지 않기를 간절히 희망하였다. 愁州로 한 번 찾아가려는 생각이 있으나 거리가 먼 데다, 죄인의 몸으로 유람을 다녀서는 안 되겠기에 그럴 수 없다고 하였다. 자신은 날로 쇠해져 심신을 정리하여 온전하게 죽을 일만 남았다고 하고, 뜻이 있으나 이루지 못한 일이 많았는데, 기력과 정신이 쇠해져서 어쩌지 못하는 것을 한탄하였다. 오직 상대와 같은 이가 곁에 있어서 죽기 전의 일에 도움이 될 것이나, 그 또한 바랄 수 없는 일이라고 하고, 門內의 公事와 私事가 두서가 없는데 상대 같은 이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하였다.
추신으로, 振伯 兄에게는 편지를 쓰려고 했으나, 늙어서 빨리 쓰지를 못하는지라 후편을 기약한다고 하였다.
李壽岳은 반대 당파의 모함을 받아, 1886년(고종 23)에 영남의 명사였던 雲圃 李中麟, 泗上 李東弼 등과 함께 4년간 북쪽 변방에서 유배생활을 하였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권경열,최연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