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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년 이진상(李震相) 서간(書簡)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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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내용분류: 개인-생활-서간
작성주체 이진상
작성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작성시기 1870
형태사항 크기: 33 X 20.6
장정: 낱장
수량: 1장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안동 가송 영천이씨 농암종택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안내정보

1870년 이진상(李震相) 서간(書簡)
1870년 1월 29일, 이진상이 상대의 안부를 묻고 반촌에 들어간 자신의 아들을 부탁하기 위해 보낸 편지이다. 이진상신령 산소에 관한 일을 묻고, 겨울 납향제 때 결원된 벼슬자리는 이미 발 빠른 자들이 차지한 상황을 이야기 하며 6월 도목정사 때에 수령 자리 하나라도 얻을 수 있지 않겠냐고 하였다. 그리고 기구한 자신의 상황이 고통스러워 기력이 없음을 나타내었다. 다음으로 자신의 아들의 과거시험과 관련하여 아이의 길 떠나는 비용, 흉년이 들고 역병이 돌며 길도 험한 상황, 반촌에 들어간 이후 감싸주고 보호해줄 사람이 없음을 걱정하고 있다. 그래서 믿을 만한 사람은 상대뿐임을 말하며 잘 가르쳐 주기를 바라고 있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김순주

상세정보

1870년 1월 29일, 한주 이진상이 상대의 안부를 묻고 반촌에 들어간 자신의 아들을 부탁하기 위해 보낸 편지
내용 및 특징
1870년 1월 29일에 寒洲 李震相이 상대의 안부를 묻고 반촌에 들어간 자신의 아들을 부탁하기 위해 보낸 편지이다.
처음 지난겨울에 상대에게 보낸 편지를 상대가 보지 못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즉 그가 벼슬길에 나가던 때에 여러 곳에서 받은 편지에 자신의 편지가 섞여 있었을 것이며 또 자신의 아들이 과거 길을 떠날 적에 상대와 만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자신은 궁벽한 시골에 치우쳐 있으면서 서울 소식을 듣지 못하여 눈 내린 밤 강가 누각에서 함께 있었던 그리움과 달 뜬 새벽 객지 나그네의 꿈만 같던 당시의 일 이 두 가지의 생각이 사무치고 있음을 이야기하며 상대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하였다. 이어서 상대의 안부를 묻고, 乃宇 柳胥鎬가 科擧일로 상경한 것을 통해 상대가 고향 소식을 들었다고 판단하여 그의 고향 소식 역시 평안한지 물어보았다. 또한 신령의 산소에 관한 일에 대하여 근황을 묻고는 염려되는 마음을 전달하였다. 이어서 겨울 납향제 때 결원된 벼슬자리에 관하여 이미 발 빠른 자들이 차지한 상황을 이야기 하며 6월 도목정사 때에 수령 자리 하나라도 얻을 수 있지 않겠냐고 하였다. 그러나 山林에 거처하며 도를 닦고 있는 고상한 사람이 도목정사와 같은 벼슬길을 말하는 것이 자칫 도심을 손상시켜 웃음거리가 될까 염려스러움을 말하였다. 다음으로 자신의 근황을 이야기 하고 있다. 즉 자신의 숙부의 질병과 노환을 걱정하고, 기구한 자신의 상황이 고통스러워 기력이 없는 등의 상황을 전달하였다. 본론으로는 자신의 아들이 우연히 과거시험과 관련하여 어떠한 분수를 얻었음을 이야기 했다. 그러나 아이의 길 떠나는 비용, 흉년들고 역병이 돌며 길도 험한 상황, 반촌에 들어간 이후 사방으로 비호해 줄 사람이 없다는 점 등을 들어 걱정하고 있다. 그래서 믿을 만한 사람은 상대뿐임을 역설하며 잘 가르쳐 주기를 바라고 있다. 이 외에도 내우의 과거에 관한 일에 대하여 장원급제를 바랄 수 있을 것이라며 미리 축하하였고, 상대 역시 몸을 보중하기를 바라며 이 편지의 끝을 맺었다.
발급인인 이진상(1818~1886)은 자는 汝雷. 호는 寒洲. 본관은 星山이다. 성주에 거주하였다. 부친은 源祜이다. 숙부인 凝窩李源祚의 문인이다. 1849년 식년시 2등으로 생원에 입격하였으나 대과는 포기하였다. 『應旨對策』,『畝忠錄』등을 저술하였다. 67세 때 나라에서 遺逸로서 義禁府都事를 제수하였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위정척사 운동을 벌였고 후에 한주학파를 형성하였다.
이 편지는 현재 피봉이 확인되고 있지 않다. 따라서 정확한 수취인을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이진상이 상대에 대해 자신을 ‘內從’으로 표현하고 있는 점으로 보면 상대는 그와 내외종간인 인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본문에서 확인되는 내우 류서호(1823~?)는 이진상의 내종 즉 내우의 입장에서 表從인 관계를 가진 인물이다. 또한 내우의 상경을 통해 상대가 자신의 집안 소식을 들었을 것이라고 판단하는 내용은 상대가 내우와 한 집안 사람 즉 형제일 가능성이 높다.『星山李氏世譜』에 의거하면 이진상의 둘째 고모가 전주유씨 柳致敎에게 시집갔다. 그의 자식들로는 본문에 등장하는 내우 류서호 뿐만 아니라 博羅 柳肯鎬(1819~1876), 柳膺鎬(1821~?), 柳冑鎬가 있다. 이들 가운데 서울에서 관직생활을 지냈던 인물은 류긍호로만 확인된다. 따라서 이 편지의 수취인은 류긍호일 가능성이 높으나 유추만 할 수 있을 뿐 확실하지는 않다.
또한 위『세보』에 의거하면 이진상의 자식으로는 大溪 李承熙(1847∼1916), 漁岑 李鍵熙(1855~1900), 聾洲 李鏞熙(1858~1897), 李銓熙(1862~1930)가 있다. 이들 가운데 관직생활과 같은 특별한 이력이 있는 이는 이승희이다. 그리고 당시 연배로 봐서도 이건희 이하 형제들은 10대였다. 따라서 본문에서 得分하여 반촌으로 상경한 아들은 이승희로 볼 수 있을 것이다. ‘得分’이라는 용어는 당시 과거시험과 관련하여 일정한 점수를 얻었다는 의미이다. 즉 시험의 일부 과목을 면제 받는 등의 특전을 뜻한다. 당시 이승희는 20세를 전후한 나이였다. 따라서 이 편지를 통하여 그가 이 시기에 이러한 특전을 통해 과거시험을 보기 위하여 상경한 이력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진상의 부친인 이원호의 형제로는 李奎鎭에게 출계 간 凝窩 李源祚(1792~1872), 聾啞 李源書(1832~1907)가 있다. 이 편지의 발급연도인 1870년은 이원조가 사망하기 2년 전이기에 본문에서의 ‘노환을 앓고 있던 숙부[亞候]’는 당시 30대 후반이었던 이원서라기 보다는 이원조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본문의 내용을 통해 그가 그 당시에 이미 노환을 앓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외에도 ‘납과’라는 용어를 통해 당시 겨울 납향제 즈음에 관직의 결원을 보충하는 제도가 있었고, 이때에 자리를 얻지 못하면 이후 도목정사를 기약했던 것이 관직을 염원하던 당시 사대부 계층의 일부 사례였다는 점도 생각 해 볼 수 있다. 그리고 ‘筍束’, ‘雪夜江樓之想 月曉旅榻之夢’, ‘浮陽之失水’등의 용어 또는 문장을 사용하고, 산림에 거하는 자가 관직을 언급하는 것이 도심에 어긋나는 점을 이야기 하며, 자신과 아들을 ‘천성이 踈懶한 자’라고 표현하는 등의 내용을 통해 문필과 겸손을 갖춘 이진상의 도학자로서의 면모를 볼 수 있다.
간찰의 사연이 짧을 경우 상하좌우의 여백이 그대로 남지만, 사연이 다 끝나지 않을 경우 본문의 상여백에 이어 적고, 그 다음은 시작할 때 남겨 두었던 오른쪽 여백에 이어 적으며, 그 다음은 본문의 행간에 이어 적는다. 이러한 순서는 간찰을 개봉하여 읽어 나갈 때 접은 것을 펴서 읽은 뒤, 시계 반대방향으로 내지를 돌려 가며 읽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이 간찰의 경우는 우측 첫째 줄인 ‘昨秋書’에서부터 내용이 시작되어 상단 좌측 여백, 상단 우측 여백의 순서로 내용이 이어진다. 마지막으로 우측 여백에 연월일과 성명을 기재한 회문형식이다. 행간에 이어 적지는 않았다. 우측 하단 및 우측 상여백에 일부 결락이 있는데, 전체적인 내용을 파악하기에는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平闕은 문장을 쓰는 과정에서 특정한 명사를 만났을 때 행을 옮겨 쓰거나 혹은 공간을 띄워서 글자를 쓰지 않는 것을 말한다. 평은 행을 바꾸는 것으로 擡頭를 말하고, 궐은 글자를 비워두는 것을 隔字 또는 間字를 말한다. 세로쓰기를 할 때, 평상적으로 시작하는 글자의 위치를 ‘平行’이라고 하는데, 대두법을 사용하여 높이 적는 위치를 ‘極行’이라고 한다. 궐은 평처럼 대두를 사용하여 극행으로 올려 적거나 행을 바꾸는 것과 달리 존대를 해야 할 용어를 띄어 적는 방법이다. 이 편지에서는 약 3번 정도 대두와 격자를 사용하여 존경을 표현했다.
이 편지는 영천이씨 농암종택에서 엮은「先賢筆蹟」 안에 수록되어 있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김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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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1870년 이진상(李震相) 서간(書簡)

昨秋書未見答 而還得訊 想因
仕進之日 鄕書筍束 而兒行忙未■[奉]
別故耳 僻坐窮巷 京耗難憑 而
雪夜江樓之想 月曉旅榻之夢
兩相流注 則倘有之否 春寒惻惻
仕體啓居 增毖萬休 曾聞還住
舊寓 宿愼倘已快豁 乃宇想已上來
鄕音都安 新寧山事 近何出場 路遠
人覬 鬧端難平 是可慮也 臘窠旣被
疾足 挨到六政 能判一麾否 山人語到
政目 恐損道心 爲一㰤也 內從 亞候疚
損 入今年尤添癃患 元氣大損 春和倘
得康復 而畸狀恒苦 頭風眼眵妨書
胎似浮陽之失水 迷兒偶爾得分 徒添
跋涉之費 歉癘路險 關慮殊切 且
入泮后 四無墻壁 所恃者惟尊 而尊
亦老慱而不專 且汨於冷帽 無暇
餘念及之矣 奈何 乃宇科事 果
何如 熟手也終場也 似有嵬捷之
望 蘄祝在此而已 忙未各書 雷照如何 所試異場異■…■
事指導 隨機提醒 想不待鄙言矣 渠性踈懶 倍■…■
似其父 老情不能無懸懸耳 餘惟默會 兼冀可愛 不■[備]
庚午 元月 念九日 內從 震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