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0년(철종11) 4월 1일, 노포의 복인 최영록이 유림의 제반 문제를 논의코자 한개의 응와 이원조에게 보낸 편지
내용 및 특징
1860년(철종11) 4월 1일, 鷺浦의 服人 崔永祿(1793-1871)이 유림의 제반 문제를 논의코자 한개[大浦]의 凝窩 李源祚(1792-1872)에게 보낸 편지이다.
공부의 방해가 될 정도라던 상대의 병세가 어떤지를 묻고 자신도 눈과 머리가 모두 흐릿하여 공부를 하지 못하고 있다고 한탄하였다. 高山의 모임에 다녀온 소식을 자세히 들려 달라고 청하였고, 자신이 맡은 講長은 연전에 쓴 비용이 많아 보충해 놓은 다음 遞任되려고 하다 보니, 조금 늦춰지는 것뿐이라고 하였다.
고을의 物論이, 전 고을을 통틀어서 講에 응할 儒生이 많아야 5,6人 뿐이지만, 이제 居接하게 하면 各 門中에서 應할 사람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을 것이라고 하니, 習俗이 좋지 않아서이긴 하지만 다수의 의견을 따르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다만 그들의 재주가 편중되어 있어 時文에 익숙하지 않으니, 그들을 잘 인도하려면 상대와 같이 명망과 실제를 갖춘 사람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고 하면서, 부디 승낙하여 고을과 輿望을 저버리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하였다.
後浦의 文集은 상대가 지어준 글을 환수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는데, 저간의 곡절은 모르겠으나 전해오는 말을 듣자면 彼此 모두의 不幸이라고 할 만하다고 하면서, 일전에 그 門中에 편지를 보내어 대략 벗의 도리를 진술하고, 조만간 校正하겠다는 등의 말을 고해주었으나 답장의 내용은 자신이 옳다는 것을 굽히지 않으니 걱정이라고 하였다. 오래도록 상대방과 대화를 하지 못해 속이 황폐해지는 것 같으니, 이달 20일에 會所에 나아가 뵙고자 한다고 하였고, 현재 鰲巖書院에 있는데 소란하여 이만 줄인다고 하였다.
추신으로, 會集하여 글을 짓는 것은 매우 시급하니, 즉시 書院의 하인들로 하여금 居接하겠다는 뜻을 속히 돌아가며 보여서 輿望에 부응해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권경열,김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