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6년(철종7) 11월 28일, 이정상이 가정의 제반 사항을 상의하기 위해 아버지 이원조에게 올린 편지
내용 및 특징
1856년(철종7) 11월 28일, 李鼎相이 가정의 제반 사항을 상의하기 위해 아버지 李源祚에게 올린 편지이다.
이달 20일 전에 官便에 보낸 편지는 잘 받았는지 묻고, 大成은 26일에 비로소 들어왔는데, 중도에 병으로 쓰러졌으나 高靈順을 만나 어렵게 살아서 돌아왔다고 하면서, 부친의 안부를 물었다. 영남 출신 동료들이 輪直하는 것은 드문 일이라고 하고, 政事가 있는 달인데, 혹시 遞職되지는 않았는가를 물었다. 贈職하는 帖은 이미 내렸을 것으로 추측하고 어떤 行狀으로 하였는가를 물었다.
觀兒(觀熙)는 잘 지내나, 추위가 걱정이라고 하고, 正初의 賀禮 때에 과거일이 判下하였으니, 焚黃 날짜를 정할 수 있겠다 하고, 금번에는 冠服이 없어서는 안 되니, 紅袍 1領을 가지고 오라고 하고, 韜子는 紅色과 紫色 2件을 사오기 바란다고 하였다. 100兩은 禮洞에서 바꾸어 쓰려고 하는데, 물가가 너무 올랐고, 또 봄, 여름에는 果品이 없어 고민이라고 하였다.
上家가 흉년을 만나 사정이 어렵기 때문에 祭需와 雜費는 모두 자신 쪽에서 부담하려고 한다고 하였고, 顯揚하는 효성은 뜻을 이루었으니, 정월 후에 즉시 돌아오고 다시는 올라가지 않겠다는 뜻으로 말할 만한 곳에 말해두고 오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자신은 어머니의 감기로 마음을 졸였다가 밤새 좋아졌다는 것과, 자신의 병도 점차 회복되어 四六湯 30帖을 먹고 나았다고 하였다. 막내아우는 다행히 들기는 하였으나 다른 사람의 손가락질을 받아서 걱정이라는 것과, 棠軒은 한결같이 공정하게 하였으나 몇 명의 著名人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는 말을 전했다고 하였으나, 구체적인 사실은 미상이다.
學禊 모임 때 나아가야 하지만 나귀가 병이 나서 걱정이라는 것과, 沙村 從弟 金아무개는 며칠 묵었는데 온 마을이 官事로 인해 피신해 있다고 하였다.
遠村의 李敍五가 흉년을 벗어날 계책 때문에 들렀다가 淸道로 갔다는 것, 永娥가 10일 쯤에 출발하여 보름 뒤에는 巖浦로 들어갈 예정이라는 것을 말하고, 西洞宅에 부쳤던 편지와 흥정한 돈 4냥은 찾았는지를 물었다. 朴先達이 내려간 뒤에 회복해 간다는 것과, 裴生이 다시 온 것은 이미 이전 편지에서 말씀드렸다고 하였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권경열,최은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