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4년 4월 10일, 이야순이 본인이 지은 남곡 권상길의 묘갈명에 대해 지적해 달라고 부탁하는 편지
내용 및 특징
1824년(순조 24) 4월 10일, 李野淳이 본인이 지은 南谷 權尙吉의 묘갈명에 대해 지적해 달라고 청하는 편지이다.
이야순은 상대방을 마음속으로 그리워하였는데 그것을 어찌 잊겠냐고 하면서 공부하시는 일상생활이 더욱 보중할 것이라 생각된다는 말로 서두를 시작하였다. 그런 뒤에 ‘紫洞’의 의견을 이미 정지시켜 그 쪽과 관련된 일이 이미 끝났으니 실로 우리 사림의 다행이라고 하였다. 노론의 세력과 관련된 의견을 정지시킨 일인 듯하다. ‘자동’은 안동김씨 壯洞을 말하는데, 청음 김상헌의 증조부 대에 문과에 급제한 김영, 김번 형제는 고향인 안동소산을 떠나 서울 생활을 하면서 壯義洞에 터전을 마련했다. 장의동은 원래 창의문(자하문) 아래에 있었는데, 紫霞洞 또는 紫洞으로 불리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 장동이라 한다.
이야순은 이어서 다만 춘부장께서 조금 편찮으신데 노고가 쌓인 뒤라서 괴이할 것이 없을 거라고 하였다. 그러나 객지에서 조리되고 보호되시는데 많이 거리낄 것이니 이별이 서운할 뿐만 아니라 삼가 오래지 않아 돌아오기를 빌 뿐이라고 하였다. 그런 뒤에 자신이 편지를 보낸 주된 목적이 나오는데, 南谷 權尙吉의 묘갈명은 감히 하지 못하는 것이라서 사실 지었던 것을 숨겨 놓았다가 지난번에 본가의 사람이 찾아내버려서 너무 황송하고 부끄럽다고 하였다. 자신의 묘갈명을 본 여론들은 뭐라고 하였는지 궁금해 하면서 상대방에게 그들의 높은 안목으로 지적해 주신 것에 흠이 없다 할 수 없겠지만 들은 대로 알려주시기를 바란다고 청하고 있다.
발급인 李野淳(1755-1831)은 자가 健之, 호는 廣瀨이고, 초명은 有晦, 초자는 景容, 본관은 眞寶이다. 李象靖의 문하에 출입하였으며, 이상정이 죽은 후 金宗德에게 훈도를 받았다. 젊어서 부형의 권유로 과거를 보러 갔다가 科場의 무질서와 폐습을 보고는 벼슬길을 단념, 일생을 학문에만 전심하였다. 1796년(정조 20) 漱石亭을 세우고, 퇴계의 유서를 쌓아 놓고 연구하였다. 편지 가운데 나오는 묘갈명의 주인 權尙吉(1610~1674)은 자가 子貞, 호는 南谷․遯翁․近裏齋이다. 본관은 안동으로 아버지는 瓚이고 어머니는 전의이씨이다. 1635년(인조 13)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유학하였다. 병자호란 때 대가가 남한산성으로 피신했을 때 聖廟를 개원사로 옮겨 봉안하였으며, 최명길이 화의를 주장하자 성토하며 반대의 상소를 올렸다.
이 편지는 영천이씨 농암종택에서 엮은「先賢筆蹟」 안에 수록되어 있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김선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