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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1년 김노범(金魯範) 서간(書簡)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K04+KSM-XF.1821.4819-20120630.008125700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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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내용분류: 개인-생활-서간
작성주체 김노범
작성지역 경상남도 진해시
작성시기 1821
형태사항 크기: 27.5 X 47
장정: 낱장
수량: 1장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안동 하회 풍산류씨 화경당 /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안내정보

1821년 김노범(金魯範) 서간(書簡)
1821년 12월 17일에 인재 김노범이 지방관으로서 근무성적을 심사 받은 일과 상대에게 종이를 보내달라고 부탁하기 위해 보낸 편지이다. 김노범은 관직생활로 여러 달 객지에 머물러 있고, 고을 일로 눈썹 펼 날이 없다고 하였다. 또한 지난번에 근무성적을 받았는데 성적이 좋지 않아 사직서를 올려야 하여 병을 핑계 대며 올렸다고 했다. 또 중순에 상대와 함께 심문하는 일은 문서로 주고받는 것 외에는 같이 자리하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그는 쓸 종이가 다 되어 종이 대여섯 묶음을 하인에게 시켜 다듬어서 보내달라고 부탁하였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김순주

상세정보

1821년 12월 17일, 인제 김노범이 지방관으로서 殿最를 받은 등 자신의 상황을 알리고 상대에게 종이를 보내달라고 부탁하기 위해 보낸 편지
내용 및 특징
1821년 12월 17일에 忍齋 金魯範이 지방관으로서 殿最를 받은 등 자신의 상황을 알리고 상대에게 종이를 보내달라고 부탁하기 위해 보낸 편지이다.
처음 상대의 편지를 받고는 안부를 확인하게 되어 위로된다고 하였다. 자신은 관직생활로 여러 달 객지에 머물러 있는 와중에 몸이 항상 건강하지 않고, 또 고을 업무로 눈썹 펼 날이 없이 고민하고 있다고 하였다. 또한 지난번 殿最를 받았는데, 결국 고향으로 돌아갈 날이 멀지 않았다고 하면서 그전에 상대를 만나 회포를 풀자고 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전최를 받은 입장에서 사직서를 올려야 하기에 상대방이 가르쳐 준 대로 병을 핑계 대며 올리긴 했으나, 중순에 상대와 함께 추국하는 일은 문서로 주고받는 것 외에는 합석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그는 쓸 종이가 다 떨어져서 만들어야하는데 자신의 고을에서는 만들 만한 도구가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종이 대여섯 묶음을 하인에게 시켜서 搗砧하여 보내달라고 부탁하였다.
발급인인 김노범(1759~1827)은 자는 景默, 호는 忍齋, 본관은 金海이다. 예천에 거주하였다. 부친은 錫祚이다. 1795년 式年試 병과로 문과에 급제, 禮曹佐郞 · 熊川縣監 · 承文院正字 · 忠淸道都事 등을 역임하였다. 웅천현감 때는 김해 진영의 兵馬節制都尉를 겸하기도 하였다. 유고가 전한다.
이 편지는 피봉의 여러 가지 형식 가운데 單封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단봉이라는 것은 피봉이 하나인 것으로 피봉이 있는 경우와 피봉이 없는 경우가 있다. 이 편지는 피봉이 있는 경우이다. 피봉에는 상대에 대한 정보 쓰고 자신에 대한 정보는 낮추어 적는다. 이 편지의 피봉 역시 상대에 대한 정보로 ‘金陵政軒 執事 回納’을 쓰고 좌측에 한 칸 낮추어 ‘屛山吏上謝狀’을 썼다. 따라서 이 피봉을 통해 수취인은 당시 금릉부사를 지낸 인물이 될 것이고, 발급인은 병산웅천현감을 지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병산웅천 즉 현재의 진해지역의 고명칭이다. 또한 김노범은 상대에게 자신을 ‘弟’로 표현했다. 이는 수취인이 그와 동년배 정도의 인물이었다는 점을 말해준다. 그리고 피봉의 봉합처에 ‘省式謹封’을 적었다. ‘생식’은 보통 상대 또는 자신이 상복을 입고 있는 상황에서 사용하는 투식이다. 이 편지의 발급연월인 1821년 12월 이전의 다른 편지 즉 1820년 11월, 1821년 1월과 4월 편지에는 자신을 ‘服弟’ 또는 ‘服人’으로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이때에도 복 입기를 마친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省式’을 쓴 듯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편지의 내용에서 그는 지방관을 지내면서 당시 考課 즉 전최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고과제는 관원의 성적을 評定하는 이른바 오늘날의 근무성적평정과 비슷한 제도이다. 吏曹兵曹에서 매년 두 차례 관원의 功過를 조사하여 그 벼슬을 올리기도 하고 내리기도 하였다.『대전회통』에는 ‘每年末에 吏曹는 모든 관원의 出勤日數 및 事故缺勤日數를 조사하며, 觀察使는 守令 七事의 實績을 조사하여 上奏 報告한다’고 되어있다. 이러한 전최는 보통 上中下로 평가하는데, 하를 받으면 보통 면직 또는 파직 되나 중을 받게 되면 당시 관례적으로 사직상소를 올렸다고 한다. 이 편지의 정황상 김노범은 당시 전최에서 중 정도의 점수를 받았던 것 같다. 따라서 금릉부사를 지내고 있던 상대방의 권고에 따라 병을 핑계대며 사직상소를 올렸던 것 같다. 중순에 있을 추국에 관한 일은 확실한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아마도 고을 안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한 추국일 것이다. 그는 전최로 인해 사직서를 올려야 할 상황이므로 이 추국하는 장소로 나가지 못한다고 한 것이다.
간찰의 사연이 짧을 경우 상하좌우의 여백이 그대로 남지만, 사연이 다 끝나지 않을 경우 본문의 상여백에 이어 적고, 그 다음은 시작할 때 남겨 두었던 오른쪽 여백에 이어 적으며, 그 다음은 본문의 행간에 이어 적는다. 이러한 순서는 간찰을 개봉하여 읽어 나갈 때 접은 것을 펴서 읽은 뒤, 시계 반대방향으로 내지를 돌려 가며 읽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이 간찰의 경우는 우측 첫째 줄인 ‘乍阻’에서부터 내용이 시작되어 상단 좌측 여백에 이어 적고는 마지막으로 우측 여백에 연월일과 성명을 기재한 회문형식이다. 행간에 이어 적지는 않았다.
平闕은 문장을 쓰는 과정에서 특정한 명사를 만났을 때 행을 옮겨 쓰거나 혹은 공간을 띄워서 글자를 쓰지 않는 것을 말한다. 평은 행을 바꾸는 것으로 擡頭를 말하고, 궐은 글자를 비워두는 것을 隔字 또는 間字를 말한다. 세로쓰기를 할 때, 평상적으로 시작하는 글자의 위치를 ‘平行’이라고 하는데, 대두법을 사용하여 높이 적는 위치를 ‘極行’이라고 한다. 궐은 평처럼 대두를 사용하여 극행으로 올려 적거나 행을 바꾸는 것과 달리 존대를 해야 할 용어를 띄어 적는 방법이다. 이 편지에서는 약 3번 정도 대두와 격자를 사용하여 상대에 대한 존경을 표현했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김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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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1821년 김노범(金魯範) 서간(書簡)

金陵政軒 執事 回納
屛山吏上謝狀 省式謹封
乍阻拜候 懷仰政切 卽
承惠問 謹審比來
政候動止一向神衛 仰慰
溸無任區區 弟 累月作客
之餘 身家每多不健 且以邑
事 無展眉之日 是悶中 昨
接殿最 歸日自在不遠 未前
當一晋敍阻計耳 在我道
理 一番辭狀 在所不已 依視
病報 而中旬會推事 弟之
所苦如是 故無路合席 文
書來往外 無他策 未知
如何 用簡乏盡 方有造用
之意 而此無搗砧 玆以仰控
幸望五六卷 分付下隸 精搗以
送 如何如何 餘忙甚 不備狀禮
辛巳臘月十七日 弟 金魯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