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9년 8월 15일, 이원조가 추석 인사와 함께 안부를 묻기 위해 누이의 남편에게 보낸 편지
내용 및 특징
1819년(純祖 19) 8월 15일, 李源祚가 누이의 남편에게 추석 인사와 함께 안부를 묻기 위해 보낸 편지이다.
이원조는 지난번에 상대가 보낸 답장을 보배처럼 여기면서 상대를 그리워하였는데, 근래 소식이 막혀 더욱 서운하고 그립다고 하였다. 생가와 양가 부모님의 건강을 묻고 있는 것으로 보아, 상대는 양자 들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舍妹가 아이들 데리고 잘 지내는지 묻고 있어 상대방은 이원조 누이의 남편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원조에게는 생가의 누이가 4명, 양가의 누이가 5명이나 되어 정확히 상대방은 누구를 지칭하는지 알 수 없다.
자신은 아버지의 병이 근래 심해졌고, 자신도 병이 더해져 걱정이라고 하였다. 이원조의 양부는 李奎鎭(1783-1822)으로, 3년 뒤인 1822년 7월 24일에 죽음을 맞는데, 아마도 당시 병을 앓고 있었던 것 같다. 薪憂는 採薪之憂의 준말로, 자신의 병을 말한다. 『孟子』 公孫丑下에 齊王이 맹자를 부르자, 맹자가 나무를 할 수 없을 정도로 병이 들어서 나아갈 수 없다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편지에는 臺官의 직함을 헛되이 맡은 지 이미 한 달 남짓 지났다고 했는데, 『承政院日記』에 의하면, 이원조는 1819년 7월 18일에 司憲府의 정5품직인 持平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병을 이유로 사직소를 올리고 그 해 9월 29일 遞差될 때까지 한 번도 그 자리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래서 직명이 결정 나기 전에는 한가로이 출입하기 어렵다는 말을 편지 말미에 하고 있는 것이다. 겨울에 한 번 갈 수는 있겠지만 그 전에 상대가 한 번 찾아와주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끝을 맺고 있다.
李源祚(1792~1871)의 자는 周賢이고, 호는 凝窩이다. 시호는 定憲이다. 奎鎭의 아들로, 생부는 亨鎭이다. 규진과 형진은 친형제간으로, 이원조는 백부에게 양자 간 것이다. 형진도 敏儉에게 양자 들어갔다.
姻弟는 처남과 매부 간에 자신을 일컫는 겸사이다.
이 편지는 영천이씨 농암종택에서 엮은「先賢筆蹟」 안에 수록되어 있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최연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