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2년 10월 28일, 강운이 대흥에서 돌아왔다는 말과 함께, 상대방이 보내준 물건으로 비석 관련 일이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게 되었다고 감사한 마음을 표현하여 류상조에게 보낸 편지
내용 및 특징
1812년(純祖 12) 10월 28일, 姜橒이 충청도大興에서 돌아왔다는 말과 함께, 상대방이 보내준 물건으로 비석 관련 일이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게 되었다고 감사한 마음을 표현하여 柳相祚에게 보낸 편지이다.
이 편지는 피봉이 있는데, 피봉을 보면 받는 사람이 ‘松營節下 下執事’로 되어 있다. 이는 강운이 송영절도사영에 보낸 것으로, 송영절도사는 開城留守가 으레 겸임하는데 당시 송영절도사는 류상조이다. 류상조는 전임 유수 閔耆顯이 죽자 1811년 8월 3일에 그 자리에 임명되었다.
강운은 근래 분주하게 지내던 중에 만났다 헤어져 위로와 서운함이 간절하다는 말로 서두를 시작하였다. 이어 정무 보는 생활이 어떠한지, 상대의 아들은 부모 모시고 학문하며 잘 지내는지 그립다고 하였다. 강운은 대흥에서 병든 몸을 끌고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대흥과는 풍경이 달라지니 오히려 정신이 맑아지는 듯하다고 하였다. 대흥은 충청도에 속한 지명으로, 종4품 군수가 임명되는 지역인데, 군수는 同僉節制使를 겸임하게 되어 있다.
이 편지를 보면 류상조가 강운에게 물품을 보내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 물품이 정확하게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石事가 그 물품으로 인해 쉽게 완성될 희망이 있어 은혜가 크고 이번에 묘 아래로 운반해 갔다는 말을 통해, 대략 비석 세우는데 필요한 물품일 것이라고만 유추할 뿐이다.
강운은 물품을 묘 아래로 옮겨 놓고 바로 고향으로 간다고 하면서 언제쯤 류상조와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서글픈 마음을 토로하였다. 류상조는 당시 송도(현재의 개성)에 있기 때문에 안동 지역으로 돌아가는 강운과 만나기가 쉽지 않기에 더욱 서글프지 않았나 싶다.
강운(1772∼1834)의 자는 擎厦이고, 호는 松西로, 姜(氵+竹/朿)의 아들이다. 본관은 晋州이다. 1807년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正字·典籍·持平등을 역임했으며, 홍문관부제학에 추증되었다. 저서에 《松西集》 10권이 있다.
류상조(1763∼1838)의 자는 爾敬이고, 호는 逸愚이다. 西厓 柳成龍의 8대손이며, 豊恩君 柳宗春의 아들로, 생부는 柳海春이다. 본관은 豊山이다. 시호는 貞簡이다. 1794년(정조 18) 春塘臺試에 을과 1위로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1820년(순조 20)에는 豊安君에 封君되었다. 저서에 『燕行錄』과『逸愚集』이 있다.
강운은 류상조에게 자신을 記下라고 하였는데, 기하는 옛날 직위나 계급, 신분 등이 낮은 사람이 그보다 높은 사람에게 자신을 겸손하게 일컫는 말이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최연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