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6년 7월 22일, 이만흡이 상대방의 안부를 묻고 묘소를 이장하는 일로 수고로운 자신의 근황을 전하기 위해 보낸 편지
내용 및 특징
1806(순조 6)년 7월 22일, 苟完齋 李萬熻이 더위 중의 상대방 안부를 묻고 부모님 묘소를 이장하는 일로 수고로운 자신의 근황을 전하기 위해 보낸 편지이다.
먼저 이만흡은 요즘처럼 소식이 없었던 적이 없었기에 아득하게 그리운 마음을 떨칠 수 없었다는 인사말을 시작으로 해서 상대방을 비롯한 그 부모님과 집안사람들의 안부를 차례로 물었다. 자신은 늘 앓던 병이 올해 더 심해졌고, 계절이 지나도 식구들이 앓던 극심한 병이 낫지 않아 근심스럽다고 하였다. 또한 사제 집의 장례는 묏자리와 날짜 때문에 어려움을 겪어서 4월에 시작하여 늦여름에서야 끝냈으며, 둘째 조카의 묵은 병은 아직도 뿌리 뽑지 못하여 그 아비가 애간장을 태운다고 하면서, 집안의 광경이 갈수록 황량해지는 것이 괴롭다고 하였다. 그리고 지금은 후사로 들어간 곳의 어버이 묘소를 이장하고 있는데, 자신의 마음에 용납할 수 없어서 여러 번 옮겨 모시기는 했지만 예의에 있어서 어긋나는 일인지라 마음을 썩히고 있다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전례 없는 가뭄으로 백성들의 탄식이 극심한데, 상대방이 있는 영해울령 지역은 가물지 않다는 소식을 들으니 위로가 된다고 하였다.
편지의 발급인 이만흡(1740-1814)은 자가 熙老, 호는 苟完齋, 본관은 永川, 부는 李廷秀, 생부는 李廷蕃이다. 경전과 사기를 비롯하여 의약·복서 등에도 능하였고, 저서로는 [苟完齋集] 1책이 전하고 있다. 이만흡은 17살 되던 해에 생부가 돌아가시자 어린 나이로 동생들과 상례를 집행하였는데, 이 편지에서도 후사로 들어간 어버이의 묘를 이장하는 일에 온힘을 쏟고 고심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또한 그 당시에 묘를 옮겨서 다시 장사지내는 緬禮를 행할 때 풍수와 택일 등의 문제로 오랜 시간 동안 여러 번 이장하기도 하는 장례의 풍속을 살펴 볼 수 있다.
이 편지의 피봉은 따로 피봉이 없는 單封의 형식을 나타내고 있는데, 내지에 사연을 쓰고 접은 곳이 바로 피봉이 된다.
이 편지는 영천이씨 농암종택에서 엮은「先賢筆蹟」 안에 수록되어 있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서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