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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0년 권방(權訪) 서간(書簡)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K04+KSM-XF.1790.4717-20120630.01872570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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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내용분류: 개인-생활-서간
작성주체 권방
작성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작성시기 1790
형태사항 크기: 44.3 X 31.5
장정: 낱장
수량: 1장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안동 하회 풍산류씨 충효당 /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안내정보

1790년 권방(權訪) 서간(書簡)
1790년(정조 14) 9월 15일에 권방이 대론이 일어나자 통문을 내지말자고 하기위해 상대방에게 보낸 편지이다. 먼저 상대방의 안부를 묻고, 조카의 과거 낙방을 위로하고 있다. 또한 크게 대론이 일어나자 자기는 괜한 변란을 일으키지 말자는 삼계서원 원장 기천 씨의 의견을 따랐는데 이에 대한 상대방의 의중을 묻고 있다. 마지막으로 여식의 혼례일을 10월 중을 벗어나지 않도록 조금 물릴 계획임을 알리고 삼계서원 원장의 편지와 자신이 서원으로 보낸 편지를 베껴서 보낸다고 하고 있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김인호

상세정보

1790년 9월 15일, 권방이 대론이 일어나자 통문을 내는 일은 비방을 초래하기 때문에 내지말자고 하기위해 보낸 편지
내용 및 특징
1790년(정조 14) 9월 15일에 權訪이 대론이 일어나자 통문을 내는 일은 비방을 초래하기 때문에 내지말자고 하기위해 상대방에게 보낸 편지이다.
권방은 먼저 사위가 와서 당신의 편지를 받고, 여러 형제들이 잘 지내는 것을 알아 위로되고 마음이 시원해진다고 했다. 당신의 조카가 과거에 떨어진 것은 실로 우리들의 運氣에 관계되니 서운하고 유감스러움은 오래되어도 풀리지 않으나 빨리 되든 늦게 되든 때가 있으니, 다만 더욱더 정밀하게 담금질 하면 어찌 한번 실패한 것이 장차 크게 펼치려고 할지 어떻게 알겠냐고 했다.
자신은 외람되게 중요한 직임을 맡아서 마침 대론이 일어난 것을 만나 망령된 말을 하다가 공의에 죄를 얻었는데 결국 상대방께서 지나칠 정도로 인정하는 말을 해서 자신이 바라던 바에 크게 어긋나지 않았다고 했다. 다만 三溪書院 원장 其天 씨의 편지가 어제 이르렀는데, 통문을 내는 것은 곧바로 자르는 것이라 비방을 초래한다고 했고 또 글로 쓴 것은 입에서 말한 것만 못하다고 하니, 그 주된 의론은 도내 사람들과 부화뇌동하지 않는 것이라 했다. 또한 피차간에 서로 의견대립을 해서 자체적인 변란이 생겨나게 하려 하지 않는 것이니 이 주장이 마땅할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아침에 齋任에게 답장을 써서 그에게 말 잘하는 한 선비를 보내서 감히 따르지 않겠다는 뜻을 진달하게 하고 곧 돌아오게 했다고 하였다. 대개 이 일은 고요하게 진정시키는 것만 못하니, 소를 올리는 일은 절로 이루어지지 않게 하는 것도 안될 것이 없고, 또한 三江의 道會는 좌도의 유림들이 다른 의견을 세운다면 어떻게 홀로 성사되는 상황이 있겠냐고 했다. 널리 의논을 해서 중도를 얻을만한 사우가 자신 옆에 없어서 다만 억측으로 행한 것이라 매우 근심스럽고 탄식된다고 하면서 일러주실 일이 있으면 편하신 대로 잘못된 생각을 지적하여주길 바란다고 했다.
이어 여식의 혼례일은 이렇게 명을 받았으나 다만 일신을 빛나고 빛나게 하는 것 외에 하나도 준비한 것이 없습니다. 혼례일 전에 아마도 돌아갈 수 없을 듯하니, 날을 잡는 것에 대해 마땅히 다시 일관에게 말해서 10월 중을 벗어나지 않도록 조금 물릴 계획이니 과연 뜻대로 될 수 있겠습니까? 또한 집사께서 너그럽게 용서해주실 것을 감히 바라지는 않으니 어찌하겠습니까? 삼계서원 원장의 편지와 제가 서원으로 보낸 편지를 베껴서 보낸다고 했다.
발급인 권방(1740-1808)은 자가 季周, 호는 鶴林, 본관은 安東이다. 증조는 權份, 조부는 權可正이고, 부친은 權濤이다. 외조부는 金元烈이며, 부인은 權文海의 후손 禮川權氏이다. 大山 李象靖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783년 문과에 급제한 후 承文院副正字에 제수되었으며, 1787宗簿寺主簿가 되었다가 12월에 昌陵令으로 옮겼으나, 1788년 부친상을 당하여 낙향하였다. 1792司憲府監察·1793兵曹佐郞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고 학가산 남쪽으로 은거하였다. 1807全羅都事에 임명되었지만 병으로 부임하지 못하고, 이듬해 11월에 생을 마감하였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김선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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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1790년 권방(權訪) 서간(書簡)

省式 星霜儵忽
淡制遽闋 伏惟
撫時孝思 益增廓然 壻郞戾止 頓
釋懸渴之情 而
華翰在手 不翅如一番承晤也 仍審九

聯棣體履萬祥 慰瀉亡已 惟是
令咸飮墨 實係吾輩運氣 悵觖歎
恨 彌久而未弛也 然遲速有時 但益
加精淬 則安知少屈者 將欲其大伸也耶
査少弟 猥忝重地之任 適値大論之發
率尒妄說準擬 得罪於公議 乃蒙
執事過加 肯可始信鄙見 不大悖於望
也 但三溪長其天氏書昨到 而以發通爲
直截 而招謗 且曰筆之於書 不若言之於口
云云 其主議 蓋不雷同於道內 而亦不欲
彼此乖隔 以生自中之變 此論似爲得當
故朝者答書齋任 使之送一能言之儒
陳其不敢隨行之意 而卽歸 未知其無
大違於事面否 大槩此事 自有主張者
此間此等之論 皆指斥於兩先生子孫 來
頭風色 實多可慮 不如靜而鎭之 使疏
事 自底於不成 未爲不可 且三江道會 左儒立異 則豈
有獨能有成之勢哉 此所以姑遣儒生 使之緩頰 雖如此
恐無後時不及之弊 未知盛意以爲如何 傍無士友
可以博議 而得中處 只以憶見行之 甚是憂歎 如有
可敎之事 從便指迷 爲望 女息于歸之日 謹此承
命 而但光光一身之外 無一措備 其前 恐不得回旋 此
當更言於日者 更不出陽月內 欲少退計
果能如意否 而亦不敢望
執事之寬恕也 奈何 三溪長書及少弟之送
院中書 謄送 視至爲望 餘忙甚 不備 伏

下察 謹拜謝狀上
庚戌菊月望日 査少弟 權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