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8년 12월 11일, 정옥이 오촌의 척숙에게 편지를 받고 그에 대해 답장을 쓴 것으로, 자신의 근황과 매번 편지로 좋은 가르침을 주어 감사하다는 마음을 전하기 위해 보낸 편지
내용 및 특징
1748년(영조 25) 12월 11일, 鄭玉이 梧村의 戚叔에게 편지를 받고 그에 대해 답장을 쓴 것이다. 자신의 근황과 매번 편지로 좋은 가르침을 주어 감사하다는 마음, 그리고 척숙이 지은 詩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전하기 위해 보낸 편지이다.
편지 서두에서 한동안 소식이 뜸하다가 이번에 척숙의 편지를 받아 그 편안함을 알게 된 것이 매우 기쁘다고 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질병으로 직명을 받기가 어려웠다는 근황을 전하였다. [조선왕조실록] 1748년 11월 14일 기사에 정옥이 正言에 제수된 사실이 있는데, 이 편지가 쓰여진 시기를 볼 때, 그가 직명을 받기 어려웠다는 말은 이를 두고 한 말인 듯하다.
이어서 척숙이 편지를 보낼 때마다 좋은 가르침을 받게 되어 매우 감사하다는 뜻을 썼다. 직접 나아가 가르침을 받아야 하지만 이것저것 많은 것에 구애되니 스스로 서글프고 또 상대방인 척숙이 매우 그립다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척숙이 지은 [柳亭韻]이라는 시에 ‘不勝情之’ 구절의 ‘勝’자 자리는 平聲이 놓여야 할 것 같으니, 척숙이 다시 잘 살펴보고 자신의 견해가 맞다고 여긴다면 평성의 다른 글자로 고치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었다. 또, 柳亭의 주인은 자신의 外族인데, 그에게 전하여 보여주기 전에 척숙에게 이 사실을 먼저 말한다고 덧붙였다.
편지를 보낸 鄭玉(1694-1760)은 본관은 淸州, 字는 子成, 號는 牛川으로 藥圃 鄭琢(1526-1605)의 5대손이고 정석제(鄭碩濟)의 아들이며 奉化에서 출생하였다. 權斗經(1654-1725)의 문인으로 어려서부터 담대하고 기지가 있었다고 한다. 그는 1725년(영조 1) 사마시에 합격하고 1727년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1730년 權知承文院正字가 되었다. 후에 지평을 거쳐 대간이 되었는데, 時務를 조리 있게 고하며 이해에 좌우됨이 없이 간언하여 영조의 특별한 신임을 받았다. 1759년(영조 35) 좌승지에 올랐다가 황해도 감사로 부임하여 1760년 그 곳 임지에서 사망하였다.
편지 오른쪽 상단에 鄭監司라고 적혀 있는데, 이는 후대에 누군가가 이 편지를 쓴 시기와 상관없이 鄭玉의 마지막 관직명을 기록해 둔 것으로 보인다.
이 편지는 영천이씨 농암종택에서 엮은「先賢筆蹟」 안에 수록되어 있다.
『淸臺日記』, 權相一, 한국사료총서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최은주